백제의 의자왕
우리가 백제의 '의자왕'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의 내용 중 일부인, '삼천궁녀 의자왕' 또는 '백제의 향락의 왕', '백제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나의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이도'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바로 세종대왕이 떠오를 것이고, '고담덕'하면 광개토태왕이 떠오를 것이다. '이도'는 세종대왕의 이름이고, 세종은 나중에 후대왕으로 부터 받은 시호 또는 묘호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이름은 무엇일까. 바로 '부여의자'이다. 그 이유는 바로 백제의 마지막왕이기 때문에, 후대왕에게 시호를 받지 못하여 본명 그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정복군주
한국사를 좋아하거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공부해본 사람은 이런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고, 대야성을 점령하여, 신라를 괴멸 일보직전까지 압박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신라를 왜 공격했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함락된 한성을 되찾기 위해, 백제의 성왕은 같은 압박을 받고 있었던 신라와 나제동맹(신라, 백제동맹)을 맺게 된다.
그로 인해 백제수도였던 한성(지금의 서울)을 되찾았고, 신라가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서로 나눠갖기로 한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에서 큰 패배를 하게 되고, 결국 백제의 성왕을 참수하였으며, 시신 일부를 신라궁궐 계단 아래 묻게 된다.
동맹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도 모자라, 성왕의 시신일부를 궁궐 계단 밑에 묻었다는 소식이 백제에 전해지고, 백제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백제의 후대왕 중, 이러한 신라의 악행을 잊지 않은 백제군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여의자 '의자왕'이다.
31대 백제왕으로 즉위한 의자왕은 즉시와 동시에 신라의 성을 함락시키며, 압박에 들어간다. 특히 지금의 경상남도 인근의 성을 40여 개 탈환하는 등, 정말 대단한 정복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야성(현재 경남 합천)을 점령하게 되면서, 신라에 제대로 된 복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끝내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연합(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결성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무너뜨리게 되며, 결국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의롭고 자애로운 왕
패배한 입장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에 의해 쓰인다.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의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백제의 군주를 타락한 왕으로 기록해야 했고, 그 반대로 신라는 백제를 무너뜨릴 이유를 기록해야 했다. 특히 삼천궁녀는 실제로 300명도 되지 않았다는 기록 또한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기에 의자왕은 그 이름과 같이 '의롭고 자애로운'왕이 아닌 타락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끝으로 의자왕을 한 줄로 마무리하자면 '강성한 백제를 꿈꾸었으나, 신라에 의해 왜곡된 백제의 정복군주'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글은 역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리뷰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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