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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동아시아 4개국 참전 대전투 '백강전투'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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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왜


백제와 왜는 예로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근초고왕 때 일왕에게 건넸던, 지금 일본의 국보인 '칠지도'가 있다.
당시 백제는 철을 잘 다루는 선진기술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반해 일본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철은 오늘날 반도체, AI 등 첨단기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칠지도에는 ‘백제왕이 대대로 뛰어난 성음을 내어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어, 당시 백제와 왜의 상하관계를 옅 볼 수 있다. 게다가 백제의 왕 중 무령왕이 지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에서 태어난 재외동포인 셈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의 유민들이 신라와 고구려로 가지않고 왜로 망명을 했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백제와 왜의 관계는 더욱 가까웠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동맹국이며, 형님의 나라라고 여기던 백제가 무너진 후, 백제의 왕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왜는 상당한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다.

일본의 국보 '칠지도'

 

백제부흥운동


서기 660년 나당연합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과 왕자들이 당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된다. 그로 인해 백제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드나 했지만, 곧이어 백제에 남아있던 지방 세력들이 힘을 합치게 되고, 백제부흥군을 일으키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문제 중 고구려 부흥운동의 삼, 연, 승(검모잠, 고연무, 안승)과 백제부흥운동의 흑, 도, 복(흑치상지, 도침, 복신)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흑치상지, 도침, 복신에 의해 백제 부흥 군이 일어나게 되고, 기존 백제의 땅이었던 성 200여 개를 수복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대적인 반란이었다. 백제 부흥의 기회를 잡은 부흥 군은 백제와 동맹관계였던 왜에게 파병의 도움을 청하고, 일본에 머물러있던 백제의 왕자인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하여 부흥 군을 지휘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이에 왜왕은 그 뜻을 이어받아 2년 반동안 약 2만 7천여 명, 배는 1천 척 만들며, 왜의 국운을 건 파병이 시작된다.

백강전투


출정준비를 마친 왜군은 1천 척 배에 2만 7천 명의 군사를 싣고 지금의 금강하구인 백강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열흘이나 미리 도착하여 있던 당시 최강 당나라 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대한해협을 넘어온 왜군은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왜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당나라 수군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로 당의 공격에 왜군은 대패를 하게 된다.

한편 육지에서는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군이 신라를 맞아 제대로 된 항전을 하지 못한 채 당시 임시수도였던 주류성까지 함락되면서 대망의 백제부흥운동이 막을 내리게 된다.

백강전투의 대패로 인해, 왜는 집권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지면서 정권을 내주는 계기가 된다.

백제부흥운동

 

끝맺는 말


그렇다면 왜는 왜 백제를 이토록 도왔을까? 아마도 앞에서 언급했듯 백제와 왜의 관계는 서로 동맹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 일본에서 천왕이라고 부르는 일왕의 선조는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로 인해 당시에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백제를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교과서에서 백강전투는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전투정도로만 언급된다. 우리 역사는 늘 백제는 마땅히 없어져야 할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강전투는 당시 당, 신라, 백제, 왜 동아시아 사국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재조명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에 대해 더욱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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