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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고려시대 왜 '원강점기'가 아닌 '원간섭기'일까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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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최강제국 팍스몽골리카 원나라

13세기 몽골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유럽, 북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과 유럽의 헝가리까지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강대국이었습니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유목민 특유의 기마술로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아래 사진과 같이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 원나라는 최고지도자를 '대칸'이라 부르며, 황제국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몽골제국 최대영토(출처 나무위키)

하지만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던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바로 고려였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대몽항쟁을 40여 년 동안 진행하던 중 더 이상 버티는 것이 어려워지자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를 통해 몽골제국에 항복원정을 떠나게 되죠.

그때 고려에서 몽골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이동하는 도중 당시 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몽골은 중국과 우리나라와 달리 장자승계원칙이 아닌 강한 자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당시 내몽골지역을 다스리던 아릭부케와 남송을 정벌 중인 쿠빌라이가 서로 경쟁하며 다음 대칸자리를 노리게 되죠. 고려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당시 아릭부케가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대칸 후계자로 유력한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태자는 신의 한 수를 두게 되는데, 현재 큰 세력인 아릭부케 대신 미래를 보고 쿠빌라이에게 항복을 하게 되죠. 쿠빌라이 입장에서는 40여 년 동안 몽골에게 저항하며 버티던 고려가 나를 지지하겠다고 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이 기뻐하며 북경에서 고려태자와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에게만큼은 엄청난 혜택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몽골의 전쟁사를 보면 그 나라를 정복할 때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는 잔인한 전쟁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고려만 고유의 풍속과 의복, 고려왕조까지 유지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고려의 왕을 대칸의 사위로 삼아 부마국(사위 국가)으로서 지위를 부여하게 되죠.

쿠빌라이 칸(출처 나무위키)


결국 아릭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의 대칸전쟁에서 쿠빌라이가 성공을 거둬 대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고려태자의 선택이 고려를 살리는 중요한 선택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려가 항복을 하였으니 이때부터 원간섭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철령이북지방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원나라 관리가 고려 땅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정동행성(일본정벌을 위한 관청)을 설치하여 일본정벌의 기틀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정벌이 태풍 때문에 실패하게 되고 원나라는 일본 정벌을 포기하였지만, 정동행성만큼은 없애지 않은 채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게 되죠.
특히 사법권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친원세력이 불법을 저질러도 눈감아주는 사법권을 남용하게 됩니다. 게다가 고려왕의 묘호는 조와 종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몽골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충렬왕, 충정왕과 같이 6명의 고려왕 묘호에 충성 충()을 넣어 왕의 명칭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충성 충 묘호를 넣은 6명의 고려왕

 

원나라와 가족관계


원종이 고려왕으로 등극하고 원나라 황제에게 결혼을 제안하게 되지만 우선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원나라 입장에서는 항복한 나라와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동등한 관계로 보아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종은 10년 간 지속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결국 원종의 아들, 훗날 충렬왕이 원의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을 하며, 원나라 황실과 가족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고려의 왕이 원 황실의 구성원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는데요. 충렬왕의 아들인 충선왕은 외할아버지가 쿠빌라이가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충선왕은 최초 원과의 혼혈왕으로 원나라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서열 4~5번째 정도 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왕이 원 황실의 구성원이 되며, 고려관리들이 원나라 지역을 이동할 때 특혜를 받게 되는데, 몽골어로 된 지금의 여권을 받아 원나라 어디든 이동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이후 원나라 황제들이 고려를 복속시키려 할 때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고려에서는 선대 칸(쿠빌라이)이 했던 말을 내세우며 고려를 지키게 되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간섭기이기 때문에 고려는 점점 피폐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자주정책을 실시한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려후기 개혁군주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에 대해서는 저의 블로그 글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s://repairman.tistory.com/entry/%EC%9A%B0%EB%A6%AC%EB%8A%94-%EA%B3%B5%EB%AF%BC%EC%99%95%EC%97%90-%EB%8C%80%ED%95%B4-%EC%A0%9C%EB%8C%80%EB%A1%9C-%EC%95%8C%EA%B3%A0-%EC%9E%88%EC%9D%84%EA%B9%8C

 

우리는 공민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공민왕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뭘까요. 쌍화점에서의 왕의 모습? 죽을 때까지 한여인을 사랑한 군주?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왕이 있었으니, 그는 오늘의 주인공 고려후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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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향


대몽항쟁과 원간섭기를 거치며 고려가 받은 몽골의 영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9층목탑이 불에 타는 등 많은 우리의 유산들이 불타거나 없어지게 되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몽골에 공녀와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고요. 음식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혹시 설렁탕 좋아하시나요? 설렁탕이라는 말은 몽골어 탕이라는 뜻의 '술라'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게다가 증류주를 만들어 약에 쓰기도 하였는데 이 것이 바로 소주입니다.

왜 원간섭기인가


원강점기가 아닌 원간섭기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원나라 아래 왕조국가로 보존된 것이 고려가 유일했고 고려 자체의 통치자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 중 가슴 아픈 일제강점기와 비교해 보면 데라우치, 사이토와 같은 조선총독부 총독체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원종의 현명한 선택으로 고려의 깃발을 꺾지 않았던 것은 현명한 외교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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