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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무패의 장군 이성계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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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성계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드라마 속 "방원이 네 이놈!" 하는 나이 든 중년의 모습이 생각이 나는데요. 대부분 이성계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나이가 많아서 무력이 뛰어났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허나, 고려 말 이성계는 무패의 장군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우리나라 역사 속 무패의 장군을 떠올리자면 대부분 성웅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군주 이성계가 아닌 장군으로서 이성계는 우리나라의 최강 장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성계 역(유동근 배우)

고려 말


때는 고려 말, 원나라의 간섭과 원나라에 빌붙어 대농장을 소유하는 권문세족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수탈하는 등 국제정세와 국내정세 모두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정리해 놓은 제 블로그가 있으니 나중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EA%B3%A0%EB%A0%A4%EC%8B%9C%EB%8C%80-%EC%99%9C-%EC%9B%90%EA%B0%95%EC%A0%90%EA%B8%B0%EA%B0%80-%EC%95%84%EB%8B%8C-%EC%9B%90%EA%B0%84%EC%84%AD%EA%B8%B0%EC%9D%BC%EA%B9%8C

 

고려시대 왜 '원강점기'가 아닌 '원간섭기'일까

세계 역사상 최강제국 팍스몽골리카 원나라 13세기 몽골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유럽, 북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대부분과 유럽의 헝가리까지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강대국이었습니다. 몽골

www.48lrc.com

이성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고조부인 이안사를 알아야 할 것 같네요. 이 이안사는 전주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당시 관기(국가에서 관리하는 기생)를 좋아했었습니다.
당시 별감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별감과 사이가 아주 나빠지게 되어, 결국 전주에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이안사는 가족들과 식솔을 거느리고 지금의 강원도 삼척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 이안사와 함께 피난 떠난 가구가 170호나 된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나요. 1가구당 4명으로만 계산해도 약 700명이나 되니, 이안사의 리더십이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삼척생활도 잠시,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전주에서 이성계와 관기문제로 엮여있던 별감이 삼척으로 임명된다는 소식에 또다시 170가구와 함께 삼척을 떠나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 당시 이안사는 대략 2천 명 정도의 가별초(사병집단)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가별초는 용맹하고, 충성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동북면의 맹주가 된 이성계는 고려 말 혼돈의 시기 최영과 함께 고려를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무패의 신화 이성계


한국사 최고의 보우마스터였던 이성계는 개인전투력 뿐만 아니라 병사를 다루는 능력 또한 출중하여 천생 무골의 장수였습니다. 이성계의 전투방법은 자신이 선두로 돌격하여 적장을 사살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고려 말 흉포함이 극에 달했던 여진족과 왜구에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무패의 신화를 써 내려가게 됩니다.

1361년, 박의가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은 김진에게 반란진압을 명했으나, 반란저지가 지지부진하자 이성계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가별초 1500명을 이끌고 가서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같은 해, 원나라군에 의해 퇴각을 반복하던 20만의 홍건군이 고려를 쳐들어옵니다. 홍건군에 의해 수도 개경이 함락이 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가는 상황이 되고 마는데요. 이때 이성계와 최영의 고려군이 다시 개경을 수복하여 홍건군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도망가게 됩니다.

1362년, 원나라 군벌세력인 나하추가 함경도를 쳐들어왔고 고려에서는 정휘를 보내 막게 하였지만 연달아 패배하고 맙니다. 이에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군을 막게 하였는데 여러 차례 격전 끝에 원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적장이었던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함과 군사적 재능을 존경했을 정도였습니다.

계속되는 이민족들의 침입 중에 고려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왜구라고는 하지만 당시 기록을 보았을 때 고려 후기 침입했던 왜구의 수가 임진왜란 때 침입했던 일본군의 수와 맞먹는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고려조정에서도 가장 골칫거리였는데, 이렇게 왜구들이 출몰할 때마다 이성계를 보내어 물리치도록 하였습니다.

1377년에는 5월에 왜구가 강화도 인근에서 나타나 격퇴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서해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왜구의 침략에서 가장 큰 침입이라고 할 수 있는 1380년에는 왜장인 아지발도가 주축이 된 5백 척 규모의 병력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이성계는 보내 격퇴하도록 하였는데요.
이성계는 왜장인 아지발도에게 활을 쏘아 투구를 맞춰 날리고, 곧바로 활시위를 당겨 왜장의 머리에 화살을 정확히 박아버립니다. 왜장이 죽은 왜구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고려군이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첩입니다.

이후에도 1382년 여진족 토벌, 1385년 왜구 토벌 등 이성계가 치렀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대부분 이성계에 대해 조선건국 이후의 모습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패의 이성계가 있었기에 고려가 있었고, 조선이 있었습니다.
군주 이성계가 아닌 무패의 장군 이성계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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