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뭘까요. 쌍화점에서의 왕의 모습? 죽을 때까지 한여인을 사랑한 군주?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왕이 있었으니, 그는 오늘의 주인공 고려후기 개혁군주 공민왕입니다.
원간섭기
무신정권 후반부터 시작된 원간섭기가 충렬왕을 시작으로 충정왕까지 6명의 왕 묘호 앞에, 충성 충(忠)을 넣어 몽골제국인 원나라에 충성하는 제후국으로서 위치했던 고려였습니다.
그 예로 고려왕자들이 원나라 황실의 딸들과 결혼하는 일이 많았고 이러한 고려왕자들 중 한 명이 고려의 왕이 되니, 고려는 원나라 사위국가였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여, 원나라 마음대로 고려의 왕도 바꾸어버리게 되고, 심지어 왕에서 내려온 왕이 원나라에 의해 다시 한번 왕이 되는 등 고려가 자주적으로 왕을 옹립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동북면 지방(지금의 함경도 인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해, 원나라관리가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고려의 공녀로 끌려가 황후자리에 오른 기황후의 오빠인 권문세족 '기철일당'이 고려의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니, 왕은 껍데기일 뿐 힘이 없던 존재였습니다.
강릉대군
14세기 중엽, 고려왕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의 어린 나이에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왕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고려의 공민왕이 되는 강릉대군입니다. 강릉대군이 원나라에서 총명함을 많이 보였고, 원나라 황실에서도 원에 우호적이었던, 강릉대군을 좋아하게 되죠. 강릉대군도 다른 고려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황실의 딸 중 한 명인 여인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 여인이 바로 강릉대군이 평생 사랑하게 되는 그 유명한 노국대장공주가 되겠습니다.
강릉대군이 원나라에서 생활한 지 10년이 지나고, 원나라에서 각종 봉기가 일어나니, 고려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 통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원나라는 당시 왕이었던 충정왕을 끌어내리고, 원나라에 호의적인 강릉대군(공민왕)을 고려의 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원나라를 직접 겪어 본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려의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공민왕
우리나라에서 고려의 개혁군주를 꼽을 때 고려 전기에 광종과 고려 후기 공민왕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국사시간에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은 귀에 딱지가 지도록 많이 들어 본 단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원과 자주정책을 실시했는지 한 번 알아볼까요. 공민왕에게도 기철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은 골칫거리였습니다. 고려왕 또한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철일당을 어찌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기철은 관직을 사고팔았으며, 백성들에게 수탈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겼고 불법으로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공민왕은 기철과 권문세족을 모조리 숙청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여러 대신들이 원나라에서 쳐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반대했었습니다. 결국 결심을 굳힌 공민왕은 궁에서 가짜연회를 열어 기철일당을 숙청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원나라에서 각종 반란이 일어나 고려를 침공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설명한 쌍성총관부 기억하시나요. 원나라에서 강제로 점령한 곳으로 원나라 관리가 상주하여 관리하고 있는 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동북면을 고려 것으로 되찾게 됩니다. 이때 얽힌 일화가 하나 있는 데, 쌍성총관부 원나라의 관리 중 한 명인 사람이 이자춘인데 이는 바로 조선 건국의 아버지 '이성계의 친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이자춘과 이성계는 원, 명교체기 때 원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생각하여, 고려에 귀화하는 조건으로 고려를 도와 쌍성총관부를 고려의 군대가 점령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자춘과 이성계는 동북면의 일인자로 세력을 키워가게 됩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고려를 도왔던 인물이 나중에 자신의 손으로 고려를 명망 시키게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 자주적인 고려를 세우려 했지만 외세의 침략이 더욱 극심해지기 시작합니다. 왜구, 홍건군, 원나라 황실군, 원나라 군벌군 심지어 여진군까지 쉴세 없는 공격이 이어집니다. 게다가 왜구는 수십 차례 침략해 오는데, 그 수가 임진왜란의 왜군 수와 비견될 만큼의 큰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에는 신흥무인세력인 최영, 이성계의 활약으로 모든 왜구를 토벌하게 됩니다. 이때 최영과 이성계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아 고려의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죠. 특히 황산전투에서 악명 높았던 왜구대장인 '아지발도'를 잡으며 이성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원나라를 피해 고려를 공격한 홍건군이었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난까지 가게 되며, 홍건군에게 수도 개경을 내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고려의 영웅인 최영과 이성계가 20만 대군으로 홍건군을 몰아내며 개경을 지키고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또한 원나라 군벌인 '나하추'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지만 동북면을 자기 손바닥 보듯 했던 이성계는 나하추를 무찌르며 다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게 되죠. 하지만 또 위기가 다가옵니다. 원나라 황실군은 기철을 죽인 것을 명분 삼아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황실군대로 고려를 침공하게 되지만, 그 또한 역시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원황실군을 몰아내어 고려를 지키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건이 있었으니, 어렵게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난산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노국공주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과 대화를 하는 등 정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노국공주만을 그리워하게 되죠.
이때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할 사람을 택하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신돈입니다. 신돈에게 정사를 맡기고 결국 자신의 호위무사인 자제위 '홍륜'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개혁의 동력을 잃어버린 고려는 이후 신진사대부들과 신흥무인세력에 의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게 됩니다.
고려의 개혁군주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에서 고려를 해방시키기 위해 개혁했던 공민왕이 있었습니다. 반원자주정책을 실시하여 원나라의 풍습을 폐지하였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소유했던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줬으며, 고려의 내정간섭을 했던 정동행성 폐지와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낳았습니다.
만약 공민왕이 없었다면 우리는 변발을 하고 몽골어를 쓰고 있을 수도 있고, 일본어를 쓰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고려라고 하면 유약하고 나약한 나라로 생각이 되지만 고려후기 우리의 힘으로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시킨 군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지킨 왕이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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