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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 전기 선비, 후기 선비 뭐가 다를까? 2부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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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앞서 조선의 전기, 후기 선비 1부를 다뤘습니다. 이 글은 2부이니 1부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repairman.tistory.com/entry/%EC%A1%B0%EC%84%A0-%EC%A0%84%EA%B8%B0-%EC%84%A0%EB%B9%84-%ED%9B%84%EA%B8%B0-%EC%84%A0%EB%B9%84-%EB%AD%90%EA%B0%80-%EB%8B%A4%EB%A5%BC%EA%B9%8C-1%EB%B6%80

 

조선 전기 선비, 후기 선비 뭐가 다를까? 1부

선비 선비 하면 떠오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쓴 채 하얀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모습, 노비에게 '네 이놈!' 하며 호통치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원

repairman.tistory.com

조선이 혁명파 사대부에 의해 건국이 되고, 16세기 중엽까지 급진파 사대부(이후 훈구파)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시스템이 정립되었다.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 기술분야에도 힘을 썼던 시기였으며, 대표적인 훈구파 인물로는 정인지, 신숙주, 권람 등이 있다.

앞서 1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여가의 내용인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후략)'라고 했던 선비들이 주도세력이기에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문화의 융합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특히 여성들의 지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500년 중반 '율곡선생 남매 분재기'(보물 제477호)를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재산을 남자와 여자 구분 없이 똑같이 나눴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혼례를 치르고 아들, 딸 할 것 없이 똑같이 재산을 나누었다. 이를 보면 조선 초기 선비들의 문화는 유교적, 성리학적 기반을 두었으나, 틀에 박히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개혁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자기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선 초기 분청사기를 보면, 물고기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던가. 혁명파 사대부들이 세조시대를 거치며, 훈구세력되어 부패하기 시작하고 만다.
이때 향촌에 낙향하여 절치부심하던 온건파 사대부들이 실력으로 과거를 합격하여 정계진출을 노리게 되는데, 이러한 온건파 사대부들의 후예들이 바로 사림이다.

조선 전기 분청사기

 

조선 후기


16세기 중엽, 선조시대를 겪으며 실력으로 승승장구한 세력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조선후기를 주도하는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 사림이다. 이러한 사림의 정계진출을 막기 위해 훈구세력이 일으켰던 네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통해 사림세력의 정계진출을 방해하려 했지만, 사림이 역사의 주도세력이 되는 것을 막기에는 어려웠다.

이로써 혁명파 사대부들인 훈구세력은 점점 몰락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사림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사림은 나중에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으로 갈리며, 분화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림의 대표인물로는 이황, 이이, 김종직, 조광조 등이 있다.

그렇다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후략)'라고 했던 사림들의 문화는 어땠을까. 성리학적 이념 이외의 사상을 배척하였고, 여성의 지위는 조선 초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특히 남녀관계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여,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규제하였고, 부계의식이 강한 질서확립으로 제사, 재산의 분배에서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약화되었다. 성리학적 질서를 잘 실현하는 여성을 열녀라고 하여 칭송을 했으나, 성리학적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면 비판을 받는 시대였다.

또한 과학기술을 천하다고 생각하여 외면하기 시작해, 조선 후기 과학기술이 퇴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조선 후기 선비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개혁적인 면보다는 차분하고 보수적인 면이 중요시되었다. 조선 초기 물고기가 살아있는 듯한 분청사기의 모습보다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백자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백자

 

끝맺는 말

고려 말, 신진사대부로부터 시작된 사대부들이, 조선 건국에 있어서 세력이 갈라져, 혁명파 사대부는 조선 전기, 온건파 사대부는 조선 후기를 주도하는 세력이 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조선 전기 선비는 자유분방하고,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고, 과학기술을 중요시하지만, 조선 후기 선비의 경우 자유분방함 보다는 절제하고, 여성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과학기술을 외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사대부 출신 선비이고, 유교적 성리학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어떠한 성향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풍속과 문화가 달라지게 된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 예송논쟁을 보면서, 선비들의 답답함을 느꼈던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성리학적 명분이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해하려 노력해 본다.

이 글은 일반인 시각의 역사리뷰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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