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우리나라의 전쟁사 중 3대 대첩을 꼽아보면,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귀주대첩, 조선시대 한산대첩에 대해 사료가 많아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수대첩은 어떠한가. 고구려의 30만 병력과 수나라의 113만 병력이 붙어 이긴 전투로만 생각될 것이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를 읽고 비워져 있던 고수전쟁이 입체적으로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1위, 2위를 다투는 인물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다. 두 분도 너무 훌륭한 분이지만 을지문덕 장군 또한 위 위인들에게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에서 세력 다툼하던 시기이다.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남쪽에서는 백제, 신라가 세력의 균형을 맞춰가며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대륙은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수문제(양견)가 전진을 멸망시키고 수나라로 중국을 통일한다. 이때 양견의 아들 양광이 전진을 멸망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 양광은 훗날 수문제의 뒤를 이어 수양제로 즉위하게 된다.
수문제는 대륙을 통일한 후 그간 골칫거리였던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에 수문제는 30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우리나라에 자세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수나라의 사료에서 30만 중 대부분 전멸하여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것이 고구려-수나라 1차 전쟁이다.
이때 수문제의 아들 양광이 출정하지 않았는데, 수문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민심이 좋지 않았고, 베이징과 항저우 사이에 수로로 배가 이동할 수 있도록 대운하를 건설하게 되는데 무리한 건설로 인해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수문제가 죽고 아버지가 성공하지 못했던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정복전쟁 이 두 가지를 성공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사람을 대운하와 고구려 원정에 동원하게 된다.
본론
수양제는 고구려 1차 원정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더욱더 많은 수의 병력, 공성무기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총 113만의 병력을 고구려 원정에 참여시키게 되는데, 이는 출정하는데만 40일 걸렸다고 하니, 한마디로 선두와 후미사이의 간격이 40일이나 된다는 것이다. 정말 많은 병력이 출정되었고,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은 이에 맞서 '청야전술'로 요동성에서 맞서 싸우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지루한 공방전이 되는 가운데 수양제는 100만이 넘는 병력으로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은 고구려의 항쟁이 거세어 요동성이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보급문제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이에 별동대를 만들어 즉시 평양으로 들어가 평양성을 탈환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우중문, 우문술에게 30만 별동대 병력을 주고 육군으로 평양성으로 진격하라 명하고, 내호아에게 수군 5만의 병력을 따로 편성하여 육군+수군 연합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이때 수나라의 병력은 빠른 평양성 진격을 위해 보급부대를 따로 거느리지 않고 전투부대가 100일 치 식량과 보급품을 가진 채로 이동하게 된다.
게다가 고구려는 드넓은 평야가 아닌 산지로 이뤄져 있어, 평양까지 이동하는데 체력과 사기가 저하되고 있었다. 기어코 병력들이 무거운 식량과 병기를 바닥에 버리며 진군하게 된다. 수나라의 작전은 평양인근에 내호아의 수군병력과 합세하여 보급을 받고 함께 협공하는 것이었으나,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내호아의 수군은 육군을 기다리지 않고 평양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을지문덕 장군이 있는 고구려군은 패퇴하는 척하며 평양성을 내어주는 전략을 사용한다. 내호아의 수군은 비어있는 평양성을 본 나머지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때 평양성 인근에서 매복하고 있던 고건무장군(훗날 영류왕)의 500명의 철갑기마병(개마무사)이 기습하기 시작한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수나라의 수군은 당황하며 고구려 기마병에게 반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망가기 시작한다.
당시 을지문덕장군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수나라 육군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호아가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지칠 때로 지친 육군도 어쩔 수 없이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전술을 사용해버리고 만다. 우중문, 우문술과 내호아가 있는 수나라 진영에 합류해 있는 막사로 을지문덕이 혼자 염탐하러 나타나는데, 이때 시를 읊으니, 이 시가 바로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이다.
이 시의 뜻을 해석하자면 '너희들이 계속 승리하고 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약 올리듯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를 읊고 돌아가는 길에 우중문은 을지문덕장군을 생포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당시 수나라 책사였던 유사룡은 '어찌 대국이 혈혈단신으로 온 장군을 생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순순히 을지문덕장군을 보내주게 된다. 아마 수나라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수나라 연합군은 퇴각하기로 결심하고, 수나라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평양성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에 을지문덕 장군과 고구려군은 청천강에서 퇴각하는 수나라 연합군을 기다렸다가 강을 도하할 때 병력이 나뉘게 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대승을 이루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결국 수나라 본대병력과 연합군이 합류했을 때는 고구려 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여 수나라로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론
어떻게 113만의 수나라병력을 30만이라는 고구려 병력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일까?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첫 번째, 청야전술의 성공을 들 수 있다. 청야전술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것으로, 논과 밭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는 독약을 탄 후 성안에서 농성하는 것을 말한다. 적군이 아군지역에서 식량이나 군수물자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는 을지문덕 장군의 계책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부러 패하는 척, 적을 지치게 만들고, 평양성을 비워두는 전략을 사용하여 적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고수전쟁 이후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사료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적군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염탐을 하여 수나라군의 군세가 약해져 있음을 알고 난 후 전쟁에 승리를 이끈 을지문덕 장군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영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위의 모든 내용은 '김진명의 살수'소설에 아주 자세히 나와있으니, 꼭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역사 소설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역사전공이 아닌 일반인 시각의 블로그 글입니다. 부족한 저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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