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우리나라 역사 중 '고구려'라는 나라를 가장 좋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군사력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만으로 수십 배, 수백 배 차이나는 적과 싸워 이겨 낸 사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청야작전', '산성(산에 돌을 쌓아 만든 성) 등이 있겠지만, 필자는 '개마무사'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에 개마무사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성인이 돼서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지휘관이 뛰어나서? 고구려군이 강해서? 하지만 당시 수나라와 당나라는 전 세계 내로라할 만큼 군사강국이었기 때문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 '개마무사'의 존재 또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래 필자가 작성했던 고수전쟁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셔도 되겠다.
살수대첩 고구려 30만 vs 수나라 113만 (김진명의 살수)
서론 우리나라의 전쟁사 중 3대 대첩을 꼽아보면,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귀주대첩, 조선시대 한산대첩에 대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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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무사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기병대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며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기병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의 기병대가 집단 돌격을 할 경우 대형이 무너지면서 보병보다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달랐다.
고수전쟁 당시 평양성을 점거하고 있는 수나라 수군 5만 명이, 단 500명의 개마무사가 돌격했을 때 수나라군이 훨씬 대규모 병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한다.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철갑기마병‘개마무사’ 덕분이었다.
당시 삼국시대 최강국이었던 고구려였지만, 그러한 고구려조차도 소수의 정예부대만을 운용하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군대를 운영하려 애썼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부대가 바로 개마무사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마무사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이토록 뛰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었을까?
먼저 개마무사라는 기록에 의하면 평상시엔 가죽옷을 입다가 전쟁 시에만 철갑옷을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사용하던 무기가 바로 개마(鎧馬)인데 이것은 곧 오늘날의 전차 또는 장갑차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유의 독창적인 군사 장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철제 무기에 대한 기술력만큼은 고구려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는 달리 중장기병 중심의 군대를 운용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보병 부대나 기병 부대 둘 중 하나로만 편제되어 있는데 반해, 고구려군은 창검보병과 함께 중장거리 공격이 가능한 개마무사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적군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만약 현대전에서 일반 보병과 장갑차와 전쟁을 한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끝맺는 말
역사에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구려가 강성했을 당시 한반도를 통일했다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지리멸렬하여 고구려가 망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신라, 고려, 조선까지 대륙세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아마 더 큰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필자의 생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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