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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왜 했을까?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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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하 한. 능. 검)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죠. 삼국시대에 광개토태왕, 장수왕, 근초고왕, 무열왕 그리고 통일신라 시대의 신문왕, 고려시대의 광종, 조선 초기 태종, 세종, 조선후기 영조, 정조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흥선대원군'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한 인물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 국사에서 조선후기 개혁가 중 한 명으로 나타내고 있고, 꼭 한 문제씩은 출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우선 조선 후기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승하하고 나서 순조, 헌종, 철종을 거치며, 제대로 된 군주가 나오지 못했으니, 여러 세도가문들이 조선 왕실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고 말죠. 이후 철종이 승하하면서 후대왕으로 될 수 없었던 고종을,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노력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 (1821~1898)

 

흥선대원군 '이하응'

조선 말기 쇄국정책을 펼친 인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름 이하응,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당시 국내 정세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외세 침략도 잦았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개혁 중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쇄국정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의 생각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서양세력의 서세동점(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 시기로 프랑스, 영국 등이 교역개방을 외치며, 청나라의 북경까지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죠.

 

또한 조선에서는 제너럴셔먼호사건, 병인양요와 더불어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통상수교를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러한 서세동점과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시도사건을 보며, 흥선대원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저 서양 것들 용서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에 쇄국정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흥선대원군 대리청정 10년, '최익현'의 상소로 탄핵을 받아 끝내 흥선대원군의 대리청정기가 막을 내리게 되어버리죠.

당시 이웃나라인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에 한걸음 앞서가던 시기였는데 말이죠. 이러한 시기에 쇄국정책은 상당히 아쉽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대 상황을 보고 이해해 보면 위와 같이 서양세력의 악행을 보고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을 할 수 있을까요?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시도 사건

흥선대원군의 대명사처럼 된 쇄국정책 이외에, 세도가문들에 의해 부패했던 서원을 철폐하였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세금을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끝맺는 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저는 만약 최익현이 탄핵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계속 대리청정을 이어나갔다면, 우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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