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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임진왜란 이야기 (1592~1598)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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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전쟁 중 우리나라를 가장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쟁이 있나요? 대충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등 생각나시죠? 이러한 전쟁 중 우리가 알고 있었음에도 침략을 당했던 전쟁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일 텐데요. 그중 가장 잔인하고 국력을 쇠하게 만들었던 임진왜란이야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기 전에 선조이야기 포스팅 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Sunjos-story

 

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왕 선조'이연'이야기(feat.임진왜란)

선조하면 생각나는 것 있으신가요? 저는 임진왜란, 질투의 화신, 프로도망러 정도 생각나네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도 인조와 더불어 1위, 2위 하겠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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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조선은 개국하고 200년 간 큰 전쟁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훈구세력이 없어지고 붕당이 형성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당파싸움이 한창이었죠. 이 시기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혼노지의 변입니다.

https://www.48lrc.com/entry/bungdangs-story

 

동인과 서인, 붕당의 역사

국사시간에 우리를 괴롭혔던 것이 있죠. 바로 고려시대 문벌귀족, 무신정권과 권문세족 그리고,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이죠. 또 동인과 서인도 이념과 이익에 따라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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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게 되죠. 전국시대의 일본은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군인이 직업이었습니다. 도요토미는 미천한 출신으로 불안한 통일을 했었기에, 통일 한 뒤 직장을 잃어버린 무사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날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이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명과 조선을 침략하기로 한 것이죠.

 

도요토미는 7년 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도요토미의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는데, 동인김성일, 서인황윤길을 임명하여 일본으로 보내게 됩니다. 3개월에 걸쳐 도착한 일본,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일본에서의 대접은 형편없었습니다. 마치 조공국을 대하듯 하였죠.

 

조선으로 돌아온 김성일과 황윤길은 선조에게 서로 엇갈린 보고를 하게 됩니다.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 같다고 말이죠. 이때 선조는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김성일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렇다고 조선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충청도 이남 지방에 성을 보강했으며, 명망 있는 장수들을 지휘관으로 발령내기도 하였죠.

 

그때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가 바로 '이순신'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간과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군의 규모였죠. 끽해야 삼포왜란 등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처럼 몇천, 몇만 명 정도만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였죠. 

 

임진왜란 (1592)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일본의 배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얼핏 보아도 10만 이상 규모, 부산진의 정발 장군은 당황했습니다.

약 600여 명의 병력으로 저항하였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특히 조총의 소리에 조선군은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죠. 부산진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다음은 동래, 지금의 부산이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으로, 고시니 유키나가는 명으로 갈 테니 길을 내어달라고 하죠. 하지만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라고 되받아쳤죠. 그와 동시에 개전을 알리는 총탄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송상현이 전사하고 동래마저 일본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일본군 진격방향

 

일본군은 재빠르게 한양으로 가서 조선의 왕을 사로 잡기로 결정하고, 세 군데로 나누어 진격하였습니다.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부산에서 곧바로 부산▶대구▶한양으로 진격하고, 2 군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는 울산▶한양으로 진격하고, 3 군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김해▶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조를 잡고 서해를 이용하여 물자를 보급한다는 생각이었죠. 이에 조선은 명장인 이일을 보내 상주에서 방어를 명했지만, 일본군에 대패하였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 조정은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합니다.

 

신립의 조선군은 천혜의 요새였던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에 있는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대회전을 하는데, 탄금대는 논과 밭이었고, 기마병이 주를 이루고 있는 조선군은 논과 밭에 말다리가 빠지며 제대로 된 저장도 못해보고 엄청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에 신립은 강으로 몸을 던지며 자결하고 말죠.

 

천혜의 요새였던 문경새재를 버린 것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사실 세 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진격하는 일본군에 포위당할 수도 있기에 충주를 선택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육군이 무너 저버린 조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선조는 빠른 판단으로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도망가게 되죠. 이때 백성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는 선조를 보며, 궁을 불태우고 돌을 던지는 등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20일 만에 한양에 도착한 선봉장 고니시는 당황하고 맙니다. 궁에 있어야 할 조선의 왕이 없었던 것이죠.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일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의 전국시대 전쟁 방식은 다이묘가 절대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없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처참한 살육이 시작됩니다. 어린아이,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살육을 자행하였고, 시체가 산을 이 룰정도였다고 하니 안 봐도 비디오네요.

 

다시 선조를 쫓기 시작한 일본군은 개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이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도망가고 광해군에게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하여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합니다. 이때 광해군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분조역할을 잘 수행합니다. 일본군이 간과했던 것이 있었는데, 일본은 무사와 농민이 따로 있는 직업이었다면, 조선은 병농일치로 농민이 군인역할 또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쫓아오는 일본군을 피해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게다가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까지 생각한 것이죠.

드라마 징비록 '선조'

 

명나라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조선이 뚫리면 일본군이 명나라까지 넘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명나라는 5천 명의 병력을 조선에 투입하게 됩니다. 계획이 꼬여버린 일본군은 안 그래도 조선의 왕을 잡지 못해 당황했는데, 조선의 의병까지 일어나니 더욱 당황해 버립니다. 자신들의 전쟁방식과 정말 달랐기 때문이죠. 조선을 점령하고 있는 지금, 조선사람들이 넙적 엎드리기는 커녕 무기를 들고 덤비니 말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성웅 이순신이 활약하게 됩니다. 

 

다시 시점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날로 돌리면, 일본군 수십만 명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경상우수사 원균은 일본군이 무서웠던 나머지 70여 척의 판옥선을 자침 시키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이게 얼마나 많은 판옥선의 규모였냐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끽해야 24척의 판옥선이 전부였기 때문이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을 대비해 온 이순신의 활약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압도적인 첫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내 사천해전까지 승리를 해버리자, 일본군은 당황했죠. 대한해협을 건널 때 자침시키며 아예 길을 내줘버린 조선군이 맞나 싶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천해전에서는 이상한 거북이 모양의 배로 당해버리니 도요토미는 환장할 지경이었죠.

거북선

 

왜냐면 보급이 남해와 서해를 지나 한양까지 가야 하거든요. 도요토미는 일본의 명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파견하여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의 이억기, 경상우수사의 원균과 더불어 한산도 해협에서 일본군을 맞아 학익진을 선보이며, 엄청난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 대첩 중에 하나인 한산도대첩입니다.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아예 조선수군과의 교전을 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리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기자 조선에 있는 일본군은 조선의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거점 삼아 보급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내 전라도로 진격하는 일본군, 하지만 이치전투의 권율 장군과 진주성 전투의 김시민 장군이 일본군을 막아내며, 전라도를 지키게 되죠. 이때부터 전쟁의 양상이 변하게 되는데, 명나라군이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더욱 힘든 상황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끝내 전사합니다.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

 

조명연합군에 의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퇴하는 일본군, 게다가 한성의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에게 큰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행주대첩이죠. 행주대첩 당시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조선이 보여줄 수 있는 무기를 모두 동원하여 큰 승리를 거둡니다. 

 

지쳐있던 일본은 명나라와의 휴전을 논의하게 됩니다. 조선을 빼놓고요. 우리 땅에서 우리 백성들이 싸워 지켜냈는데도 말이죠. 부산으로 군을 철수한 일본은 왜성을 쌓고 수성에 대비합니다. 하지만 이전 진주성전투의 큰 패배를 기억한 도요토미는 휴전기간 중 제2차 진주성 함락을 명하게 되죠. 전세를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밀히 병력을 모으는 일본군은 10만 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대비를 하지 못했던 조명연합군은 당황하며,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진주성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도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휴전 협상 중 명나라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본, 그 내용으로는 조선의 충청, 전라, 경상 등 4개 지역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명나라의 황녀를 자신의 첩으로 보내라는 것이었죠. 이렇게 지지부진한 협상이 3년간 지속되고, 마침내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알리며, 일본은 재차 조선 침공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정유재란 (1597)

 

일본은 14만 명의 대군을 재차 조선으로 파병합니다. 의병에 의해 호되게 당했던 일본은 조선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잔인하게 말이죠. '눈감고 코 베인다는 말' 아시나요? 바로 이때 나온 말입니다. 일본군은 자신의 공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인의 코나 귀를 베어 바쳤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시나요? 임진왜란 초창기에는 원균이 판옥선을 버려서 일본군이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면, 이순신이 있는데 어떻게 일본군이 상륙을 했는지 말이죠. 이때 이순신은 파직되어 백의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균의 계략에 넘어간 선조가 거짓정보를 듣고 이순신에게 가토군을 공격하라는 출병을 명하죠.

 

하지만 이순신은 적의 모략이라 생각되어 출병에 지지부진하고 있자,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며 파직시켜 버립니다. 원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는데 '내가 통제사였다면 가토군을 잡았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이순신이 파직이 되고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게 되죠.

불멸의 이순신

 

일본군이 정박해 있는 칠천량으로 진격하는 원균, 하지만 일본군의 매복으로 괴멸 수준의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때 배설 장군이 판옥선 12척을 빼돌려 전라좌수영으로 도망가게 되죠. 이 전투가 바로 칠천량 해전입니다. 만약 배설장군이 12척의 판옥선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하네요.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선조는 수군이 괴멸 수준이니 육군과 합세하라고 이순신에게 명하죠. 하지만 그 유명한 대사 '상유십이, 미신불사'(신에게는 오히려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미천한 신은 죽지 않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리게 됩니다. 배설이 빼돌린 판옥선 12척과 막 수리가 완료된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조선수군과 113척의 일본군은 전라도 해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상유십이 미신불사

 

이순신이 전장으로 선택한 장소는 울돌목, 바로 명량입니다. 해남과 진도사이의 바다로 물살이 빠르고, 폭이 좁아 소수의 배로 다수의 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순신의 탁월한 지형선정으로 물살이 일본군 방향으로 바뀌면서 일본군의 배가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습니다.

 

판옥선의 총통으로 일본군의 배를 포격하였고, 일본군은 혼비백산하며 도망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입니다. 서서히 조선의 겨울이 찾아오고, 식량과 추위로 인해 일본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남아있는 일본군은 철군을 요청하였지만, 그때마다 도요토미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일본군도 드디어 일본으로 철군을 하는데, 가만히 철군하는 일본군을 볼 수 없었던 이순신장군은 노량에서 패퇴하는 적을 섬멸하기로 합니다. 명나라에서는 자신들도 하루빨리 명으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패퇴하는 일본군을 내버려 두자는 의견이었으나, 이순신장군은 이대로 적을 보낸다면 조선을 업신여겨 또 침략할 것이라며 해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량해전 중 일본군의 조총을 맞게 되는데, 이에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하며 전사하게 되죠. 조선군 또한 노량해전에서 유래 없는 많은 희생을 했으나, 이후 일본군은 정말 조선을 다시 침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이야기 어떠셨나요? 사실할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의 배경, 통일과정과 조선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의병장 곽재우 등 생략된 것들이 많아 너무 아쉽습니다. 나중에 인물 편으로 포스팅할 예정 생각입니다. 

 

글솜씨가 부족하고,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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