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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임진왜란의 영웅, 조선 15대왕 광해군'이혼'이야기 (feat.폐모살제)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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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조선시대에서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이 몇 명인지 아시나요? 바로 3명입니다. 노산군(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 연산군, 광해군입니다. 나중에 숙종 때 단종으로 추존된 노산군을 제외하면, 바로 연산군광해군입니다. 이 두 왕은 폭군이라는 이미지로 각인이 되어 있는데요. 연산군은 누가 뭐라 해도 폭군 맞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말 폭군일까요? 연산군, 광해군 둘 다 신하들에 의해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지만 너무 다른 역사적 인물입니다. 폐모살제로 반정되어 마땅한 왕이었을까요? 아니면 최근 광해군에 대해 재해석한 영화인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성군까지는 아니지만 정상적인 왕이었을까요? 지금부터 임진왜란의 영웅, 조선 15대 왕 광해군 '이혼'이야기 시작합니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이야기는 따로 포스팅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Sunjos-story

 

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왕 선조'이연'이야기(feat.임진왜란)

선조하면 생각나는 것 있으신가요? 저는 임진왜란, 질투의 화신, 프로도망러 정도 생각나네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도 인조와 더불어 1위, 2위 하겠죠? 하지만

www.48lrc.com

 

이혼(1575~1641)

영화 광해 '광해군'

 

광해군은 후궁출신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선조와 정실부인 간 아들이 없었고,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주변에서는 광해군이 세자가 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죠. 광해군이 첫째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맏형이었던 임해군이 있었는데, 아주 포악하고 패악질을 많이 하여 임금이 될 인물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죠.

 

광해군은 세자시절 그 빛을 보는데요. 바로 1592년 18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세자를 책봉하지 않은 선조는 아마도 자신이 조선 최초의 방계출신 임금이었기에 꼭 정실부인과의 적장자로 세자를 책봉하고 싶어 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세자책봉 건의에도 불구하고 책봉을 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던 신립이 탄금대에서 대패를 하고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명나라로 몽진(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마는데요. 대신들은 하나 같이 세자책봉을 건의하게 됩니다.

 

이로써 광해군에게 세자를 책봉하고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 역할을 맡기게 되죠. 하지만 의례적으로 조선은 세자를 책봉하게 되면 명나라에게 합의과정을 거쳐 임명되게 되는데요. 이것을 고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왜 둘째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냐며 반대를 하게 되죠. 광해군은 임란 중 불안한 세자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갑작스레 분조의 역할을 맡게 된 세자 광해군은 전국을 누비며 의병을 일으키고, 전쟁물자를 보급하고, 민심을 달래는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여 백성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되죠. 결국 길었던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몽진 갔다가 돌아온 선조는 요즘말로 엄청 쪽팔렸겠죠? 전쟁을 겪으며,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백성들의 바닥까지 모아 온 광해군은 성군의 자질을 갖추어 가고 있었고, 이에 백성들도 엄청난 지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그러한 광해군을 탐탁지 않아 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였던 의인왕후(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광해군보다 9살이나 젊은 19살의 인목왕후를 정비로 들이게 되죠. 

 

1606년,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납니다. 안 그래도 아버지의 질투로 불안한 입지에 있었던 광해군은 선조의 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불안해하기 시작하죠. 마치 자신의 세자자리를 뺏길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광해군은 그냥 군인데, 영창대군은 대군이죠? 군과 대군의 차이는 정실부인인 왕비의 아들은 대군, 후궁의 아들은 군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영창대군은 적장자였던 것입니다. 선조는 자신이 조선의 최초 방계출신 왕으로 정통성에 있어서 불안한 입지였기 때문에 적장자를 후대왕으로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대신들은 선조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아타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시키려 했던 것이죠. 이렇게 조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북파소북파인데요. 임진왜란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전장을 누비며 분조의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던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암, 그래도 임금은 적자가 되는 것이 맞지' 라고 하는 소북파로 나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2년 후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맙니다. 이로써 전쟁의 영웅이었던 광해군이 조선 1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죠. 당시 영창대군은 세 살로 임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1608~1623)

 

영화 대립군 '광해군'

 

34세로 임금이 된 광해군은 전쟁 당시 끔찍했던 백성들의 삶을 보았기 때문에, 전쟁 후 복구를 위해 많은 힘을 썼습니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탔던 궁을 재건하였는데요. 게다가 전쟁을 겪어보니, 부상자와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그리하여 허준을 조정으로 불러,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죠.

 

그리고 당시에는 세금을 특산물로 내게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주도에 특산품인 귤을 세금으로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귤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 갯수를 측정하여 세금을 부과하였고, 떨어지거나 상할 경우 다른 곳에서 사 와서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등 폐단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이원익의 주장을 받들어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는데, 대동법(大同法)이란 한자뜻풀이 그대로 큰 뜻으로 같게 하는 법입니다.

 

즉, 지금까지 특산물로 냈던 세금을 똑같이 쌀로 내게 하는 법인 것이죠. 대동법은 1 결 당 12두씩 쌀을 거뒀는데 지금까지 세금체계는 지주들과 농민들 중에 농민들이 더 냈다면 땅에 세금을 부과하여 지주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것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부자증세가 되겠네요. 이 대동법은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경기도에 한해서만 시행되게 됩니다. 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이 되는 데에는 100년이나 걸렸으니, 이때나 지금이나 세금제도는 시행하기가 어렵네요. 

 

후금의 성장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또한 조선과 마찬가지로 국력이 많이 쇄하고 있었습니다. 이 틈을 타 북방에서 여진족이 힘을 키우며 명나라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고 있었죠. 쇄하고 있는 명과 신흥강호, 후금사이에서 조선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후금이 쳐들어 오고 있으니, 조선에 군사를 보내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고, 후금에서는 자신들과 친교관계를 맺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조선시대고 훈구파가 없어진 사림들의 세상이었죠. 사림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바로 명나라를 아버지나라로 섬기는 사람들인 것 아시죠? 후금과의 친교는 절대 안 된다며 조정대신들과 많은 신하들은 광해군을 만류합니다. 이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에게 1만 7천의 병사를 주어 명나라를 지원하라고 명하고, 명나라가 패할 것 같으면 후금에 항복하고 만약 명나라가 이길 것 같으면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라고 명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의 입장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요동에서 조명연합군과 후금이 붙었는데 조명연합군은 처참한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르후 전투라고 하죠.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은 알만한 전투인데요. 당시 조명연합군의 사망자만 4천5천 명이나 되었으니, 이 전투를 계기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후금으로 무게 추가 기울게 됩니다.

 

강홍립 장군은 명나라가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후금에 투항을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안 조정의 대신들은 강홍립을 역적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광해군은 그와 그의 가족을 오히려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안 조정대신들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에게 이럴 수 있냐며, 서인들을 중심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정의 대부분이 서인이었으니, 더 이상 광해군을 임금으로 모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이때 서인들이 들고 온 전략은 폐모살제였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폐모살제

 

폐모살제의 뜻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뜻으로 1613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주요 관리들의 서자 7명이 수백 냥을 탈취했던 강도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던 대북파는 이 사건을 변질시켜, 광해군을 제거한 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자들이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몰아간 것입니다.

 

이에 광해군은 당시 친어머니는 아니었으나, 선조의 정실부인인 인목왕후(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덕수궁에 가두었으며,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살해하였고, 아들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 증살(초가집에 불을 지펴 쪄죽임)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영창대군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였죠. 이 것이 바로 계축옥사입니다.

 

중립외교를 선택한 광해군을 용서할 수 없었던 서인세력들은 유교적 명분과 효를 강조하기에 빌미가 되기 딱 좋은 사건이었죠. 결국 서인과 남인이 손을 잡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위시하여 광해군을 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죠. 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 교동을 시작으로 제주도까지 유배 보내지죠.

 

대부분 광해군의 말년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많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려 18년이나 유배생활을 하는데요. 심부름꾼 마저 광해군에게 영감이라고 놀리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초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인조가 왕이 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모두 유배지에서 겪은 광해군은, 1637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행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임금이었다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1641년,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광해군의 업적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을 재건하였고, 5대 사고(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마니산)를 재정비합니다. 사고란 역대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국가에 설치했던 창고입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토지대장이 소실되자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재정을 제대로 재건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하죠.

 

게다가 전란 이후 복구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기에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동의보감을 허준을 통해 편찬하도록 합니다. 조선 초기부터 없어졌던 용비어천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도, 국조보감 등 우리들의 서책들을 다시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봐도 최고의 업적은 대동법이죠. 최종단계까지 이르는 데 100년 걸렸다고 하니 양반, 대신들의 반대가 엄청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정말 연산군과 같이 폭군인가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된 폐모살제는 후대 인조집권 당시 서인들에 의해 실록이 쓰여 있는 내용이었는데요. 영창대군이 죽자 장례를 성대하게 하라는 광해군의 명이 있었을 정도로 후대에 증살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무리한 궁궐공사로 인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개보수하는 것이 무리한 공사였을까요? 물론 전후복구도 바쁜 와중에 궁궐을 다시 짓는다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을 할 테지만, 왕권이 강하지 않으면 더 힘든 것이 바로 백성들입니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을 우리는 실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었기에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로 불리어지죠.

 

지금까지 전란 이후 복구사업에 힘썼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감면해 주었고, 후금과의 실리외교로 전쟁을 막았던 광해군이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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