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 중 오천 원에 있는 위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율곡 이이입니다. 율곡 이이는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고 하는데요. 누구의 아들인지는 잘 아시죠? 그 유명한 바로 오만 원권인 신사임당(사임 신 씨)의 아들입니다.
세계 최초로 어머니와 아들이 지폐 속 인물로 지정이 된 것인데요. 그렇다면 율곡 이이에 대해 알아볼까요? 아래 퇴계 이황이야기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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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너무 재미있는, 퇴계 이황 이야기
퇴계 이황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그냥 지폐 속 인물, 성리학을 공부했던 선비정도 생각나는데요. 그렇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퇴계 이황 (1502~1571) 이황은 연산군 6년에 경상북도 안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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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1537~1584)
이이는 1537년 이원수와 사임 신 씨 사이에서 세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명문가 집안사람으로 당대 여성들과 다르게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며, 시, 그림과 같은 것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신사임당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혹시 현모양처(현명한 엄마이자 좋은 아내)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사실 이것은 나중에 집권하는 서인들이 대단한 율곡 이이를 키운 대단한 어머니란 프레임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현명한 어머니를 둔 덕일까요? 이이는 세 살 때부터 시를 짓는 등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때는 경서를 통달했다고 하니 대단하죠. 13살이 되던 해 진사과 초시(지금의 모의고사 개념)에 응시해서 장원 급제를 합니다. 이런 이이의 천재성을 알아본 외할머니는 이이에게 재산을 몰아주어 더욱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요. 그렇게 공부에 매진하던 이이는 16살이 되던 해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납니다.
게다가 아버지인 이원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에 다른 여자를 집에 들여 버립니다. 그러자 이이는 세상 사는 일에 덧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머니의 3년 상을 지내고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절로 들어가 승려가 돼버립니다. 1년 정도 승려생활을 하는데,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이는 두고두고 이이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고야 말죠. 1년 승려로 생활한 이이는 절에서 나와 다시 성리학에 매진하여 21살에 진사과 복시(지금의 수능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합니다.
그리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죠. 하지만 승려였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유생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이는 실력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하죠. 이이는 계속 학문에 몰두하였고, 보지 않아도 되는 시험까지 모조리 응시하여, 이내 구도장원공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 모두 지원해서 1등을 한 것입니다. 구도장원공이라는 것은 9번의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것인데요. 물론 매번 장원만 한 것은 아니지만, 장원을 하지 않은 시험을 세는 것이 더 빨랐습니다. 이이는 정말 천재였던 것이죠.
이때는 명종시기였는데요, 정 6품 호조정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이조좌랑, 3사에서 관직을 한 후 마침내 선조 1년에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이 되게 됩니다. 홍문관 교리직이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요. 바로 임금과의 경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홍문관 교리직을 맡은 이이는 을사사화 때 사화를 당한 사림들을 복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을사삭훈이라고 합니다.
이이는 왕조의 시기를 창업, 수성, 경장으로 나누었습니다. 창업은 왕조가 시작할 때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시기이고, 수성은 나라가 어느덧 안정되었으니 나라를 내외로 잘 수성하는 시기이며, 경장은 지배층이 타락하기 시작하면 이때 바로잡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처럼 이이가 나누어놓은 3단계 중 지금은 경장의 단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훈구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죠.
그런데, 반대로 임금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하니, 어쩌니 얘기하면 임금인 선조입장에서 기분이 좋았을까요? 이전부터 왕조는 이 씨 왕조였잖아요. 게다가 이이는 퇴계 이황과 달리 말을 할 때도 공격적으로 했으며, 임금에게 간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고, 복직하는 것을 반복했죠.
이이는 대게 서인으로 분류가 됩니다. 이는 나중에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이를 서인으로 분류했을 뿐, 이이는 당파싸움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정계에 진출하고 보니, 훈구세력은 어느새 살아지고, 자신들끼리 물고 때리고 하고 있던 것이죠. 그래서 이이는 종종, 동인과 서인의 세력다툼을 중재하려고 했지만, 날이 갈수록 당파싸움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중재하는 이이를 보며 동인, 서인 모두가 이이를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되죠. 그렇잖아요. 어느 쪽에 속해있지 않지만 자신들의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그런 거요.
그리고, 제가 포스팅한 이황 편에서는 영남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학파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학파에 따른 편 가르기가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이는 누구의 제자도 아니었고, 독학을 하여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지금으로 따지면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 타입인데, 조정에서는 대치동 출신이니, 노량진출신이니 이렇듯 누구의 제자와 출신지가 중요한 시대였던 것이죠.
이이는 싸움닭 기질이 충만해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는 동인의 스승, 서인의 스승 가릴 것 없이 비판을 해댔죠. 이에 사림들은 나의 스승님을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이의 편은 거의 없었죠.
이이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던 때,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선조는 이이에게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는 일을 지원하라고 명한 것인데요. 이러던 중 여진족, 니탕개가 난을 일으킵니다. 1만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쳐들어온 것인데요. 평화가 계속되던 시기에 1만이라는 병력이 밀고 들어오니 조선입장에서는 막기가 버거웠죠.
이에 선조는 8천 명의 지원병을 파병하는데, 이때 파병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성웅 '이순신'이었죠. 신립장군의 활약으로 니탕개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었는데, 북방에서 말을 바치는 자에게 군역을 면제해주겠다고 한 것이죠. 왕의 명령도 없이 말입니다.
이에 동인이 나서서 이이를 탄핵하고 마는데요. 선조는 집권당이었던 동인의 입에 거품을 물고 이이의 탄핵을 상소하자, 관직에서 파직시켜, 이이를 물러나게 합니다. 이후 정치를 내려놓고 후학을 양성하던 중 과로로 사망합니다.
어떠한가요? 지폐 속 인물이 될 만한 위인이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이이하면 십만양병설이 생각나는데요. 사실 이는 나중에 집권당인 서인이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낸 주장이라는 것이 학계에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는 대단한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고, 사림들의 붕당정치를 중재하기도 하였으며, 공부를 정말 많이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 또한 붙었죠. 보통 이이는 이황과 비교가 되는데요. 이황은 말년에 공부를 하며 행복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떴다면, 반대로 이이는 현실정치에서 치이다가 낙향하여 과로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이황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반인 영남에서 공부했다 하여 영남학파(동인)를 형성하였고, 이이의 제자들은 비영남지방에서 공부하여 기호학파(서인)로 나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 붕당이 계속 형성이 됩니다.
이황이 [성학십도]를 저술했다면, 이이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제도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싸움닭, 공공의 적, 당대 천재, 율곡 이이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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