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두 번의 백의종군,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26.
반응형

여러분은 해군제독하면 누가생각나시나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이순신장군이 생각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호레이쇼 넬슨 제독(1758~1805)이 가장 유명하죠. 보통 세계 3대 제독하면 이순신, 호레이쇼 넬슨, 도고 헤이하치로를 이야기하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단 한 척의 배도 침몰하지 않은 제독은 이순신이 유일합니다.

 

심지어 세계 3대 제독이라는 도고 헤이하치로(1848~1934)는 이순신을 제일 존경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나요? 누구나 아는 이순신이야기지만, 우리나라사람이면 꼭 알아야 하는 이순신장군이야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 이야기는 제가 포스팅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Imjin-war

 

임진왜란 이야기 (1592~1598)

기억나는 전쟁 중 우리나라를 가장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쟁이 있나요? 대충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등 생각나시죠? 이러한 전쟁 중 우리가 알고 있었음에도 침략을 당했던 전쟁이 임진왜란

www.48lrc.com

 

이순신 (1545~1598)

이순신 동상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1545년 4월 28일,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명문가 집안인 덕수 이 씨 집안으로,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글공부와 별개로 당시 건천동은 훈련원이 있던 곳이었는데, 그 영향이었는지 전쟁놀이를 즐겨하였습니다.

 

당시 같은 동네에서 자란 형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훗날 영의정이 되는 서애 유성룡이죠. 아직은 조선전기이다 보니, 태어난 곳은 한양이었지만 외가인 충남아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굉장히 성실하고, 바른 모습이었을까요? 답은 아니었습니다.

 

참외가 먹고 싶었던 이순신은 참외밭 주인에게 참외를 달라고 하였는데, 참외밭 주인이 이를 거절하자 말을 끌고 와 참외밭을 다 망쳐놓았고,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전쟁놀이할 때 진을 형성하였는데, 그 안으로 동네 어른이 들어오자 활로 눈을 겨눠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성웅 이순신 맞나요? 어머니는 이러한 이순신을 극진한 사랑으로 키우게 됩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방수진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무관출신인 장인은 이순신의 자질을 알아보고 문과보다는 무과시험을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하는데,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자주 하였고,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거시험을 그만두고 무인으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1572년 28살 이순신은 별과에 응시하여 시험을 보았으나, 시험도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맙니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버드나무를 꺾어서 다리에 부목을 댄 후 시험을 끝까지 마치게 되죠. 하지만 결과는 낙방, 4년 뒤 32살의 나이로 결국 무과에 합격하게 됩니다. 당시 무인들은 무예를 연마하였지만 이순신은 문과 무 모두 뛰어난 인재가 되죠.

 

1576년 함경도 부근에서 장교로 근무하게 되고, 3년 뒤 훈련원 봉사에 임명됩니다. 관직에 임명된 함경도 지방에서 근무할 때 여진족들의 침입이 잦아 병력증강을 요청했지만 요청은 묵살되었죠. 그러던 중 여진족이 쳐들어와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160여 명의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갔는데, 순신은 부하장수들과 함께 여진족 본영으로 쳐들어가 다리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60여 명의 백성들 구출해 온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순신은 상관에게 밉보이게 되어 상관은 이순신이  독단적인 행동을 했다고 조정에 말하였고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던 때, 병조전랑이었던 서익이 자신의 측근을 진급시키려고 하자, 순신은 이에 반대하며 서익의 눈 밖에 나게 되죠. 이로 인해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으로 강등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의 일이 오히려 소문이 나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죠. 1580년 전남 고흥의 수군만호로 임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어린 시절 친구였던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게 됩니다. 엄청난 파격승진이었죠. 그만큼 실력은 대단한 장군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때 대간들은 너무 빠른 진급이 아니냐며 반대했지만, 짧은 기간에 한 단계씩 승진시키는 전략으로 끝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이죠.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가 제정신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종 6품에서 정 3품으로 엄청난 고속승진을 하게 된 순신은 전쟁을 대비하게 됩니다. 당시 전라좌수영은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나대용이라는 군관을 시켜 거북선(귀선)을 제작하게 됩니다. 거북선은 일본군의 등선육박전이라는 전투전략을 알지 못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었죠. 이 거북선건조는 향후 조선을 살리는 정확한 선택이 됩니다.   

 

임진왜란 (1592~1598)

 

1592년 봄, 부산 앞바다에서 시작된 전쟁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선조도 북쪽으로 피신하게 되죠. 연일 패배하던 조선에 드디어 첫 승리를 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이 지휘하던 전라좌수영에서 승리한 옥포해전입니다. 적의 26척을 파괴하며 옥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하죠. 그리고 합포, 적진포까지 조선군의 피해가 거의 없이 승전을 이어갑니다. 게다가 이후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이 모양의 철갑선까지 등장하니 일본군도 적잖게 당황하게 되죠. 거북이처럼 생긴데다가 사방에서 포를 쏴대니 말입니다.

 

거북선

 

당시 이순신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일본은, 명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쿠키 요시타카를 파병하여 조선군과 한산도해협에서 맞붙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있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병력만으로 이순신을 상대하려 하죠. 그렇게 견내량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을 한산도 앞으로 끌어내어 학익진을 선보이고,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원균의 경상우수영과 함께 엄청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한산도대첩이죠. 사실 학익진이 만능인 전술처럼 보이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학익진의 모양 중 하나의 스팟이라도 깨진다면 오히려 싸먹히는 형세가 되기 때문이죠.

 

많은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도 이순신의 전술을 가르치고 있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드디어 남해바다의 재해권을 장악한 조선수군은 연일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으며, 곡창지대인 전라도까지 방어해 내는 등 승전보를 전하고 있었죠. 이때부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드디어 전라좌수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게 되죠. 보급로가 끊긴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던 것과 반대로 이제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이순신만 없으면 보급로가 생겨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첩자를 보내 반간계를 꾸리게 되죠. 실제로 일본은 선조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이순신이 출정하게 끔 만들어 버립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명하지만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거짓정보임이라 생각하여 출병에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왕명을 거역한다며 두 번째 백의종군을 명하죠. 파직은 물론이거니와 한양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아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신의 어머니는 여수에서 배를 타고 상경하던 중 사망을 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순신이 압송되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비어있는 틈을 타 원균은  '내가 통제사였다면 가토군을 잡았을 것'이라고 선조에게 장계를 보내죠. 선조는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출병을 명합니다. 하지만 원균이 조선수군의 연합함대와 함께 거제도 앞바다로 이동하던 중 일본의 세키부네 60척에 의해 판옥선 130여 척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수군이 세계 해군사에 유래 없을 정도의 황당한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장수들과 장군들, 판옥선까지 대부분 잃게 되어 조선은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죠. 이 굴욕적인 해전이 바로 칠천량 해전입니다. 이 당시 배설 장군이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패퇴하면서 전라도 해역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불멸의 이순신 '투옥 장면'

 

선조는 백의종군해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라는 대간들의 의견을 들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12척의 배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합류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죠. 이때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신에게는 오히려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저는 죽지 않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오히려 상(尙)자 보이시나요? 오히려 12척이나 있다고 합니다. 12척으로 300척이나 되는 적을 맞서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라니요.. 참 대단합니다. 오히려 12척이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느껴지는 건 저뿐인가요?

상유십이 미신불사

 

이후 수리가 완료된 판옥선 1척을 보강한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13척의 판옥선으로 수백 척의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1597년 10월 25일, 적을 울돌목으로 끌어내어 방어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미 땅에 떨어진 조선 수군의 사기를 끌어내기 위해 이순신은 출전 전에 '필사즉생, 필생즉사',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전하며 조선수군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사기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때 좁은 바닷길목과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3척의 판옥선으로 113척의 적을 섬멸하여 기적적인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직전의 조선을 구한 명량해전입니다. 사실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무쌍을 찍은 것으로 나와있죠? 거짓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진짜로 사기가 바닥이 난 조선수군과 장군들이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나가 싸워 사기를 돋아 결국 이긴 역대급 해전이었던 것이죠.

영화 명량 '대장선'

 

이후 1598년 9월, 갑작스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을 하게 되고, 그동안 철군을 요구했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명군도 지친 전쟁의 끝이 보여 싸움 없이 명나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이순신만큼은 절대 일본군을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일본군을 돌려보낸다면 조선을 업신여겨 재차 침공을 하리라 생각해서였죠. 서로 목적이 명확했던 조선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남해 앞바다에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도 전래 없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노량해전니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흉탄을 맞고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하며 전사하게 되죠.

이순신 장군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데, 정말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1598년 12월 26일 향년 54세의 나이로,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죠. 당시 명나라 제독이었던 포악하기로 소문난 진린은 그간 이순신의 능력과 성품에 감탄하여 절대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지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순신을 명나라로 데려가 명의 군관으로 삼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이순신에게 감복했는데, 노량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땅이 꺼질 만큼 슬퍼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선조가 바로 충무공으로 작위를 내렸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인조 때가 되어서야 충무공으로 추존받게 되었죠. 선조는 참.. 끝까지 마음에 안 드네요.

 

이렇듯 23전 23승이라는 세계 해군사에 유래 없는 승리를 거둔 이순신을 세계적인 명장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난중일기 

 

완벽할 것 같았던 이순신도 난중일기를 통해 많은 것을 남겼는데, 사실 이순신은 부상, 고문, 스트레스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으며, 전란 중 아들과 어머니가 죽는 것을 경험하며 혼자 소금창고에 가서 펑펑 울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게다가 몸이 너무 아파 배에서 웅크리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었고, 기절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순신은 작은 일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장에서 사용함으로써 그 능력을 인정받았죠. 조선수군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누구였는지 아시나요? 일본군?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혹독한 훈련으로 조선수군을 동북아 제일의 수군으로 성장시켜 놓았던 것이죠. 이렇듯 부하장수들에게 엄격하게 지휘한 이순신이었지만, 낮은 계급의 병졸들이 성과를 내거나 전사하면 아무리 낮은 계급이라 하더라도 꼭 기록에 남겨놓아 포상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원균이 전투는커녕 일본군의 수급을 베어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고 할 때도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절대 싸움보다 수급을 먼저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며 너희들의 공은 내가 다 기록해 놓았으니 걱정 말고 전투에 임하라고 하기도 하였죠. 

 

원리원칙주의자

 

이순신의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사건이 같은 덕수 이 씨였던 율곡 이이(이조판서)가 초급장교였던 강직한 이순신을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이에 주변에서는 출세길이 열렸다고, 무조건 만나보라했으나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단칼에 거절을 해버리죠.

 

또한 전라좌수영의 발포 만호로 재직할 당시였습니다. 당시 전라좌수사인 성박이 이순신에게 종을 보내어 발포지역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하게 되죠. 이에 이순신은 "무엇에 쓰려고 하길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전라좌수사께서 "풍류를 즐기는 지라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베어오라고 하십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죠. 이에 발끈하며 직속상관의 명령임에도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정말 원리원칙주의자이죠? 저 당시가 아니더라도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면 파직되거나 옥에 갇히게 될 텐데 말이죠. 

 

어떠셨나요? 이순신장군의 이야기. 그냥 막연히 우리나라의 성웅, 충무공 정도로만 알고 있지는 않으셨나요? 이순신장군의 일대기를 앎으로써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노량해전까지 전투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었으나, 블로그 특성상 자세히 다루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따로 포스팅하기로 하고 여기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의 백의종군, 충무공 이순신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전
연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5년)[1]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2]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 및 전멸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3]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 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4]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5]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3명 전사,10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6]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19명 전사,114명 부상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 명 전사
­
­
4차 출전[7]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8]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 명 전사[9]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6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10]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피해 없음
 
­
1594년
(선조 27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12]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8명 익사.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5000여명 사살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13]
적선 50여 척 격침[14]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 / 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15]
조선 수군 130여 명 사상,[16]
명나라 전선 30여 척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천여 명 전사
적선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3천여 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 수군 30(조선 왕조실록 및 호남절의록)~300여명(일본측 사료) 전사,[17]
300여 명 사상
명 수군 500여 명 사상
적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150여 척 반파,[18]
사상자 2만 ~ 3만 명(추정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