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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공부가 너무 재미있는, 퇴계 이황 이야기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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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그냥 지폐 속 인물, 성리학을 공부했던 선비정도 생각나는데요. 그렇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퇴계 이황 (1502~1571)

퇴계 이황

이황은 연산군 6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황의 아버지는 이황을 낳았을 때 이미 40세로, 나이가 많았는데요. 하필 이황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게 됩니다. 아버지를 여읜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크게 되죠. 그는 누구보다 글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는데요. 특히 6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12살에는 논어, 19살에는 성리학에 빠져 많은 학문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이이와 다르게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는데요. 성인이 되고 과거시험에서 3번의 고배를 마십니다. 드디어 28살 되던 해에 진사시(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하였고, 34살에는 문과에 급제하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일찍 관직생활을 했으면 여러 번의 사화에 의해 제거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이황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견제를 받지 않는 등,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황의 첫 번째 아내였던 허 씨는 결혼 6년 만에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3년 뒤에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는데요. 바로 권 씨였습니다. 혼인 전 하필 이 권 씨 집안은 사화로 인해 화를 입은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정신질환도 앓고 있었는데요. 권 씨의 아버지는 권질이라는 사람으로 사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황과는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에 권질은 이황에게 자신의 딸인 권 씨를 부탁을 하게 되어 혼인을 하게 된 것이죠. 

 

이후 이황의 가족들은 줄초상을 치르게 됩니다. 사화에 휘말려 형제가 죽고, 아내인 권 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아들도 갑자기 죽고 말죠. 이로 인해 건강까지 나빠지게 됩니다.

 

가족을 잃은 이황은 관직생활을 하던 명종시절, 을사사화를 직접 겪으며 사림들이 파직되거나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이황은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지방관직에 자원해서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역임하며, 점점 중앙정계와 멀어지려고 노력합니다.

 

풍기군수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었던 백운동서원을 임금에게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사액받아 서원이 공식화하게 됩니다. 말이 어렵죠? 여기서 잠깐! 향교서원을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향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지금의 공립학교라고 보시면 되고, 서원은 스타강사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듯싶네요. 

 

이렇게 이황이 소수서원을 만들면서 서원을 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는데요. 영남권을 시작으로 많은 서원이 이때 만들어지게 됩니다. 원래 향교에서 정해진 교과서에 따라 공부하여 과제에 급제하는 것이 제대로 된 루트였다면, 서원이 생기면서 스타강사 밑에서 공부하던 선비들도 정계진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출신에 따라 파벌을 형성하겠죠. 그로 인해 서인동인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황은 가끔 임금이 조정으로 불렀으나, 그때만 잠시 왔을 뿐 다시 낙향하여 후학을 기르고, 공부하는 데 노력하였죠. 사실 관직에 있었을 때의 이황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니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성리학의 기반이 되는 주자학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죠. 신진관료들은 이러한 이황을 보며 추종하는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신진관료들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것도 지조 있다고 생각하거니와 그런 사람이 학식까지 뛰어나다니, 재야의 고수처럼 따랐겠죠? 

 

이황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전라도 광주출신의 갓 서른이 된 기대승이라는 어린 관료와의 사단칠정논쟁 때문이었죠. 당시 이황은 58세로 잠시 조정에서 대사성을 역임할 때였습니다. 이때 이황은 지금으로 따지면 교육부장관이고, 기대승은 이제 막 급제한 공무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린 기대승이 이황의 논리를 따박따박 반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어린 관료와 8년 동안 철학적 논쟁을 하는데, 이황은 기대승의 반박에 하나하나 답변해 주게 됩니다. 지금은 조선시대잖아요? 그냥 무시하거나 혼내주면 되는데, 이렇게 건전한 토론을 하는 이황을 유생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던 조선시대에 대학자와 신진관료의 철학적 논쟁을 보면서 더욱 이황에게 매료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었겠죠?

고봉 기대승

 

 

송나라에서 넘어온 주자학을 이황만의 성리학으로 정립하여, 이황의 성리학은 조선을 이끄는 철학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황은 적을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칭송하였죠. 마치 모두의 대스승인 것처럼요. 이후에는 도산서원을 세우고 공부와 제자육성을 하다가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황은 선조시절 임금으로 하여금 성왕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을 저술한 [성학십도]를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성학십도는 자신 스스로가 마음을 올곧게 먹으면 알아서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것이죠. 이는 이이가 저술한 성학십요와 반대되는 이야기 입니다.

 

어떠셨나요? 우리나라 지폐에 들어갈 인물로 생각되시나요? 저는 퇴계 이황이 마치 푸근한 마음씨 좋은 선생님 같은 느낌이 듭니다. 

 

특히 이황은 출세를 위한 목적으로 공부를 한 것이라기보다, 공부자체를 굉장히 좋아해서, 공부로 인해 스스로 수련하는 선비였습니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퇴계선생 이후 이러한 선비들이 급증하기 때문이죠. 이전까지는 대부분이 출세를 위한 공부였습니다.

 

지금까지 모두의 대스승 퇴계 이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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