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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동인과 서인, 붕당의 역사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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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시간에 우리를 괴롭혔던 것이 있죠. 바로 고려시대 문벌귀족, 무신정권과 권문세족 그리고,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이죠. 또 동인과 서인도 이념과 이익에 따라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벽파, 시파 등등 공부하는 내내 괴롭혔던 기억이 납니다.

 

조선시대 붕당의 시작을 보통 선조 때부터 보는데요. 이시기 훈구파가 도태되고 사림파가 등용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붕당에 대해 알아볼까요?

훈구파와 사림파

 

조선을 건국했던 세력들이 조선 초기 세조시대를 거치며 훈구파가 되었고,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대거 지방으로 낙향했던 세력은, 지방에 지지세력을 탄탄히 하여 사림파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인물이었던 훈구파는 세조시대를 시작으로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선조를 거치며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등, 스스로 도태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건국 당시 지방으로 낙향했던 사림파는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고 조광조를 스승으로 삼아 실력을 키우게 되죠. 특히 성종시대부터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계에 막 진출했던 사림은 훈구파에게 네 번의 사화를 당하며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사림파는 지방에 세력을 두었다고 말씀드렸죠? 다시금 지방에서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과거를 통한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오로지 실력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이죠. 마침내 훈구파 부패의 상징이었던 윤원형을 끝으로 훈구파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드디어 사림의 시대가 왔습니다. 사림들은 각각 스승을 모시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입니다. 이 시기에 맞물려 왕이 된 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14대 왕 선조입니다. 선조는 중종의 방계출신으로 왕권을 강화하기에 매우 어려운 위치였죠. 그렇기 때문에 사림의 분화를 이용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아래 선조의 이야기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Sunjos-story

 

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왕 선조'이연'이야기(feat.임진왜란)

선조하면 생각나는 것 있으신가요? 저는 임진왜란, 질투의 화신, 프로도망러 정도 생각나네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도 인조와 더불어 1위, 2위 하겠죠? 하지만

www.48lrc.com

 

붕당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

붕당이라는 말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으시나요? 저는 어떠한 한자인지는 모르나, 매우 좋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 내내 이러한 붕당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붕당이라는 단어자체는 나쁜 뜻의 단어는 아닙니다.

 

붕당은 '朋(친구 붕), 黨(무리 당)이라는 뜻으로, 나와 뜻을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무리라는 것이죠. 우리 시대의 국회에서 여당, 야당을 이야기할 때의 당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림은 그토록 원하던 훈구파를 척결하였는데, 왜 분화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심의겸이라는 사람을 먼저 알아보아야 합니다. 심의겸은 명종의 아내인 인순왕후의 동생입니다. 외척세력이죠. 심의겸은 사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힘이 있던 심의겸을 위주로 사림세력이 형성이 되는데요. 원리원칙자인 사림은 외척세력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외척세력 대부분이 훈구파였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외척인 심의겸을 싫어하는 사림세력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조 5년, 정 5품의 이조전랑(전랑과 좌랑) 관직을 두고 세력이 나뉘게 되는데요. 이조전랑은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관직으로, 관직이 높은 편은 아니나, 지금의 인사혁신처와 같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관직입니다. 특히, 이조전랑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김효원은 이황,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사림들은 김효원을 리더로 생각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죠. 이에 이조전랑이 김효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심의겸이 반대를 하고 나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종의 외척이었던 윤원형의 집에 기거했었다는 것이었죠.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 김원형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윤원형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이 이조전랑을 하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가 될까요? 정계에 진출하기 전이었는데 말이죠. 결국, 심의겸이 반대한 탓에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임명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2년 뒤,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임명되었고 임기를 마친 김효원은, 다음 이조전랑 후보가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보로 거론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이에 당연히 김효원은 심충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이로 인해 사림은 심의겸과 김효원을 위시한 두 세력으로 나뉘는데, 심의겸의 집이 궁궐에서 서쪽에 있다 하여 서인(둘 다 심의겸과 서인에 시옷(ㅅ)이 들어가니 이렇게 외우세요), 김효원이 궁궐에서 동쪽에 있다 하여 동인이 된 것입니다.

 

서인의 특징으로는 심의겸과 같은 외척세력 출신도 품을 만큼 현실정치에 너그러운 세력이었고, 동인의 경우 원리원칙주의자로 원칙에 벗어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리학의 본산이었던 경상도에 뿌리를 두었던 동인은, 영남지역에 한해서 자신들의 학파가 최고라고 생각하여 영남이 아닌 지역의 선비들을 차별하기도 하였죠. 경상도가 성리학의 뿌리가 된 이유는 고려 말, 송나라의 주자학이 안향에 의해 고려로 들어오면서, 성리학이 경상북도 지방에 뿌리를 두게 됩니다.

 

사림의 공공의 적이었던 훈구파가 득세를 했을 당시에는 서로 똘똘 뭉쳤으나, 훈구파가 없어진 지금 둘로 나뉘게 된 것이죠. 이 것이 바로 붕당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서인이었던 이이의 경우 붕당을 반대하기도 하였죠.

 

붕당의 시작

 

어렵지 않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네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통해 훈구파에 짓밟힌 사림이었지만, 지방에서 힘을 키워 꾸준히 정계진출을 하였고, 훈구파 척결을 위해 한마음, 한뜻이 된 사림이었으나,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를 빌미로 사림은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 것이죠. 

 

이렇듯 조선 중기부터는 원리원칙주의자인 사림의 시대가 되면서 자연스레 무보다는 문이 중시되는 사회가 형성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계기 또한 붕당과 아예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사림은 훗날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또 분화하게 되죠. 

 

지금까지 사림이 조선 중기부터 조선이라는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붕당의 시작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자세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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