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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왕 선조'이연'이야기(feat.임진왜란)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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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하면 생각나는 것 있으신가요? 저는 임진왜란, 질투의 화신, 프로도망러 정도 생각나네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도 인조와 더불어 1위, 2위 하겠죠? 하지만 의외로 총명했다는 사실 아시니요? 게다가 방계출신인 자신의 입지를 위해 사림세력을 이용한 붕당정치를 악용했던 임금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었던 광해군과 무패의 충무공 이순신을 질투했으며, 인복이 타고난 군주였음에도 그 인복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선조'이연'이야기 시작합니다.

 

하성군 (1552~1608)

 

하성군이 어린 시절, 중종과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중종은 덕흥군의 아들 중 총명함을 보기 위해 하릉군, 하원군, 하성군에게 임금이 정사를 볼 때 쓰던 모자인 익선관을 친히 벗어 써보라며,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에 하릉군, 하원군 모두 익선관을 써보았으나, 하성군은 제가 감히 어찌 임금이 쓰는 모자를 쓸 수 있겠냐고 하며 모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하성군의 총명함을 알아본 중종은 재위 내내 하성군을 칭찬하고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하성군이 익선관을 썼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선조 (1567~1608)

 

중종에 이어 인종, 명종이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요절하면서 조정은 큰 혼란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선대왕들이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승하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거슬러 올라가 중종의 방계출신인 하성군이 왕이 되니, 그가 조선 14대 왕 '선조'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의 왕 중 서얼출신이 왕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조가 즉위하고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에 선조는 그동안의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4대 사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를 거치면서 대거 숙청되었던 사림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하는데요. 사람은 성종시기를 거치며 과거를 통해 중앙관직에 진출했지만, 4대 사화를 거치며 다시 훈구파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선조는 이들을 적극 등용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지폐의 표지 모델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바로 선조시절 함께 정사를 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퇴계이황과 율곡이이는 따로 본편을 만들어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4대 사화를 거치며 거의 몰살 직전까지 갔던 사림은 지방으로 낙향하여 자신들만의 힘을 키우게 됩니다. 이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중앙으로의 진출을 성공한 사림은 훈구파가 없어지니 자신들 사이에서 편을 가르기 시작합니다.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서인과 동인이 서로 갈라지게 되는데, 서인과 동인도 선조 편에서 다루게 되면 너무 길어지기에 간단한 설명만 하고 나머지는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어쨌든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사림 내에서도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이 자리를 두고 서로 싸웠던 김효원심의겸이 정면으로 붙게 되는데요. 최종 승자는 김효원이 됩니다. 하지만 심의겸 측은 김효원이 명종 시절 부정부패의 상징이었던 윤원형의 집에 얹혀살던 사람으로 이조전랑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냐며 비난하죠.

 

시간이 흘러 이조전랑인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이 거론되자 김효원은 어찌 왕의 외척세력이 인사권을 가질 수 있냐며 아예 다른 사람을 추천해 버립니다. 서로 으르렁대던 사림들은 이내 서인과 동인으로 찢어지게 되는데, 심의겸이 사는 곳이 궁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다 하여 서인, 김효원이 사는 곳이 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다 하여 동인이 됩니다. 여기서 또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찢어지는데요.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인해 나뉘게 됩니다. 머리 아프시죠?

 

정여립 모반사건, 기축옥사 (1589)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정여립'

지금의 교육부와 외교부를 합친 예조좌랑이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바로 이 관직에 정여립이 예조좌랑이었죠. 서인들과 친했던 정여립은 후에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동인과 함께 했습니다. 게다가 서인세력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는데요.

 

서인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 박쥐 같은 놈이라고 했겠죠? 게다가 사림은 원리원칙주의자였잖아요. 이러한 정여립은 서인들의 탄핵 속에 계속 관직을 할 수 없었는데요. 이에 정여립은 서인들의 뜻에 따라 관직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훈련도 하고 공부도 하는 대동계를 조직하는데요.

 

서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죠? 1589년에 상소가 올라옵니다. 바로 정여립이 한강이 얼면 한양으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상소였죠.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들은 당황해합니다. 정여립은 동인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이에 조정에서는 정여립을 잡기 위해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정여립은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진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을까요? 진실은 아무도 모르겠죠? 실록은 당시 승리자였던 서인들에 의해 써졌으니,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보셨나요? 이 영화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을 다룬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서 차승원배우가 정여립 역이었습니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시작으로 정여립과 연루된 사람들이 대거 숙청되는데요.

 

특히 동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서인세력으로 이때 칼을 휘두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송강 정철이죠.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숙청합니다. 그리고 잠깐! 사미인곡, 관동별곡으로 우리의 국어시간을 괴롭혔던 그 정철 맞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기축옥사라고 부릅니다. 서인이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죠.

 

임진왜란 (1592~1598)

 

영화 대립군 '선조'

조선은 1395년에 건국이 되고 200년 동안 큰 전쟁을 한 적 없이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과는 반대로 일본에서는 100년 간 전국시대를 거치며 인간병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요. 게다가 포르투갈사람들과의 교역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총을 도입하는 등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국시대를 조총으로 통일한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는데요. 전국시대가 끝난 일본에서는 그동안 매일같이 싸움질하던 무사들이 전국시대 통일로 인해  한순간에 직업을 잃게 된 거죠.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을 진출하여 안에 있는 세력들을 외부로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명에게 가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말을 합니다. 이걸 '정명가도'라고 하죠.

 

조선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죠. 하지만 지속적으로 일본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구하게 되는데, 이에 조정에서는 서인 '황윤길'동인 '김성일'이 통신사로 파견되게 됩니다. 일본으로 통신사를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데요.

 

황윤길은 통신사로 다녀와 보니 병선도 많고 전쟁에 준비가 한창인 것으로 모아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죠. 하지만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눈은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와 같으니 전쟁을 일으킬 위인을 못된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이에 선조는 김성일의 의견을 듣게 됩니다. (추후에 김성일은 잘못된 보고를 한 것에 대한 죄로 열심히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전사함)

 

선조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200년 간 평화가 계속되었고, 왜구들이 침략을 해봐야 1~2만 정도 되는 병력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선조가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름 남부지역에 대비를 했지만 고작 몇만 안 되는 병력이 올 것이라 예상했었죠.

 

이 와중에 전란을 준비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었죠. 김성일의 주장과 다르게 1592년 봄, 부산 앞바다에는 일본의 배가 가득 배치되는데..

 

4월 15일 동래부사 송상현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10만이 넘는 일본의 병력에 처참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부산진에서도 승리한 일본군은 3군데로 나눠 진격하였는데, 당시 조선의 최고 명장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 정예병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신립장군은 북방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을 잘하던 장수였고, 일본군을 매우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기병이 주력이 된 신립장군의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르게 됩니다. 탄금대에서 조선의 기병 vs 일본의 보병이 맞붙게 된 것이죠. 하지만 200년간 평화로웠던 조선군은 형편없는 전투실력에 처참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곧장 한양으로 가서 왕인 선조를 잡아서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는데요. 일본군인 한양에 도착했을 때 선조가 없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요즘말로 멘붕이 온 것이죠. 그 이유는 일본의 전투방식은 성주는 절대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일이 없을뿐더러, 전투에서 지면 할복해서 자결하거나 항복하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이죠.

 

조선의 왕이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전혀 예상 못한 것이죠. 이때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까지 망명할 생각에 한양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까지 피난 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아들인 광해군에게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하게 됩니다. 선조는 광해군으로 세자를 책봉하고 전란을 수습하라고 지시하죠.(이때 광해군은 분조를 잘하여 백성들의 높은 지지를 받음)

 

피난을 떠나는 선조를 보며 백성들은 분노했고, 궁궐도 불태워버리게 됩니다. 선조가 의주로 가있던 사이 평양을 지나 함경도까지 일본군이 왔다는 사실에 선조는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죠.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의병의 민족 아니겠습니까? 전국 각지에서 관료, 유생, 노비, 승려할 것 없이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이순신장군이 바다에서 활약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게 되죠. 이순신장군이 한산도대첩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육지에 전해지자. 조선 의병들에게 용기를 주어 일본군에게 큰 부담을 주게 되죠. 이때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협상에 들어가게 되는데, 명나라의 황녀를 히데요시의 첩으로 보내라고 한다거나, 조선의 경기도 이남지역을 모두 내놓으라는, 무리한 요구에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이 재차 침공을 하게 되니 이 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이때 이순신에게 호되게 당했던 일본 입장에서는, 이순신을 제거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첩자를 이용해 거짓정보를 흘리는데, 선조는 첩자의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의 계책이라는 판단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죠.

 

이에 선조는 임금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다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하여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요. 옥살이가 끝나고 백의종군(흰 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간다는 뜻으로 신분이 격하된 모습)을 하게 됩니다. 선조는 이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출병을 명하는데요. 이때 일본의 꾀에 넘어가 괴멸 수준의 손해를 입힙니다. 이것이 칠천량전투죠.

 

상황이 어렵다 판단한 배설장군은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도망가게 됩니다. 이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불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전투에 임하라고 명하죠. 고작 13척(배설장군이 가져온 12척에 1척이 추가됨)의 배로 133척과 싸워 대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명량해전이죠.

 

이후 계속된 수군의 승리로 기세가 높아진 조선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쫓아가 섬멸하는데, 노량에서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맙니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급사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게 되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합쳐진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렇게 끝나게 됩니다.

 

조선의 의병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승리한 이 전쟁에서 선조는 모든 공을 명나라에 돌리며, 이순신의 공을 격하시키게 되죠. 논공행상과정에서 앞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본인이 피난 갈 때 같이 갔던 호성공신을 더 높게 쳐주었으며, 특히 의병장들은 아예 논공행사 대상에서도 제외가 되었죠.

 

선조는 전란을 수습하고자 나름 힘썼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그 또한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붕당정치가 활개를 치던 1608년, 59세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조선 최악의 무능한 군주 중 한 명인 선조는 질투심이 과했고, 책임감이 없었으며,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시각도 없었습니다. 사실 선조 때부터 사림이 득세하며 조선말까지 붕당의 시대가 되어 국력이 쇠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죠. 지금까지 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 왕 선조'이연'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사실 선조 편에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광해군, 이순신, 권율, 김시민, 유성용 등 너무 많은 인물이 있어 선조 편에서 다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따로 포스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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