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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광조하고 싶은 거 다해! 조선 11대왕 중종'이역'이야기(feat.기묘사화)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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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조선의 중종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저는 중종 하면 개혁 선비였던 조광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치마바위정도가 생각나는데요. 그리고 조선의 왕중 살육을 많이 했던 왕하면 누가 떠오르나요? 태종 이방원, 연산군 생각나시죠? 하지만 중종 때 기묘사화로 인해 가장 많은 관료들이 죽었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갑자기 왕이 된 중종'이역'이야기 시작합니다. 연산군이야기는 아래에 링크해놓았으니 참고바랍니다.

https://www.48lrc.com/entry/Yeonsangun-Story

 

흥청망청 폭군 조선 10대왕 연산군'이융'이야기(feat.무오사화, 갑자사화)

조선역사에서 임금의 묘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 명 있는데요. 대부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인데요. 둘 다 묘호를 받지 못하였고, 신하들에 의해서 왕에서 물러난 것은 동

www.48lrc.com

 

진성대군 (1488~1544)

 
진성대군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성대군의 어린 시절 실록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여, 과거에 어땠을지는 전혀 알 수 없으나, 기록에 있는 중종반정이 일어난 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진성대군은 이복형제인 연산군의 횡포를 보며 자랐고, 연산군을 매우 무서워했었습니다. 야사에서는 중종반정 당일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이 주축이 되어 반정을 일으켰는데, 이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진성대군의 집을 호위하기 위해 병력을 두었습니다. 이에 반정이 실패한 것으로 착각한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러 군대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 신 씨가 이를 말리며 상황을 알고 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진성대군은 왜 바로 자결을 하려 했을까요. 그 이유는 연산군이 사람을 죽일 때 아주 잔인하게 고문을 하며 죽였기 때문이죠. 손바닥을 뚫는다던가, 뱃살을 도려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공포심 때문에 자결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만큼 연산군을 두려워했고요. 하지만 반정이 손쉽게 끝나고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니 이가 바로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입니다. 
 

중종 (1506~1544)

 
중종은 연산군이 아들이 있었고, 자신은 배다른 형제이기 때문에 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자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왕위를 넘볼경우 연산군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종반정은 훈구세력이 주도하여 일으킨 반정이기에 자연스레 주세력은 훈구파에게로 돌아갑니다. 성종 때 사림을 많이 등용했던 시기의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죠. 게다가 중종은 세자수업을 한 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정공신들이 중종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반정세력들은 단경왕후를 쫓아내야 한다고 말을 하죠. 하지만 중종은 신 씨와 애정이 매우 두터웠지만 공신세력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에 궁에서 내쫓습니다. 이에 궁에서 쫓겨난 신 씨는 인왕산 위에 올라가 중종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바위에 신 씨가 자주 입던 치마를 걸어놓았는데요. 실제로 중종은 신 씨가 보고 싶을 때 누각에 올라가 인왕산의 치마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것이 치마바위의 유래인 것이죠. 중종은 새로운 아내를 들이는데 그가 바로 장경왕후입니다. 하지만 25세에 아들인 인종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사망하게 되죠. 
 
중종은 홍문관의 기능인 왕의 자문기구를 강화하였고, 경연도 열심히 하는 등 왕으로서 노력을 합니다. 이를 통해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는데요. 하지만 반정세력이 워낙 강해서 중종의 입지는 낮았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급변하게 되는데, 바로 많은 사림들이 과거를 통해 정계로 진출을 하게 되고, 반정세력들이 나이가 들어 점점 쇠락해졌기 때문이죠. 적당히 훈구세력을 견제할 생각이 있었던 중종은 사림 중 눈에 띄게 총명했던 조광조를 등용하게 됩니다. 

 

조광조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조광조는 상당한 개혁가였습니다. 마치 조선 초기 정도전을 보는 것 같았는데요. 이러한 조광조를 중종은 무한 신뢰하였습니다. 당시 훈구파들은 같은 성리학을 사상을 이념으로 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나 종료에 나름 개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리원칙 주의자였던 사림들은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이단으로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데요.
 
이는 조광조에 의해 실시한 정책들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꿔놓게 됩니다. 또한 당시 훈구파 자제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시험족보라고 해야 할까요. 학문을 많이 알아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기에, 훈구세력은 과거시험의 족보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친인척을 과거시험에 합격시키는 일이 많아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알고 있었던 조광조는 인재를 추천을 통해 선발하고, 선발된 인원 중에 시험을 치러 관직에 등용시키는 현량과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추천된 사림파 28명의 인재들은 대부분 언론기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배치되었죠. 게다가 조광조는 당시 사림에게 이단이었던 도교식 제사를 위해 세워진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만 중종은 이를 거절하는데요.
하지만 결국 조광조의 뜻에 따라 결국 소격서를 혁파하게 됩니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과정에서는 일부 훈구대신들까지 조광조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종반정에 참여하지도 않고 공신을 받은 훈구대신의 위훈을 삭제하여 재물과 작위를 받아내자는 건의를 하죠. 이 것이 위훈삭제입니다. (중종반정 당시 주도세력이 아닌 사람들도 군사를 일으키는 소리가 나니 도성 안으로 들어왔는데, 너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공신이라고 말하며, 정난공신이 됨)
 
조광조는 중종의 선생님이 되어 경연을 함께 하며 학문을 가르치게 됩니다. 세자교육도 받지 못한 중종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사림파를 등에 업은 조광조에게 오히려 압박을 느끼게 되죠. 이에 훈구파는 눈치를 채고 조광조가 국정을 어지럽힌다며, 상소를 올려댑니다. 마침 소격서를 혁파하는 과정에서 중종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조광조와 일부 대신들을 보며, 중종은 조광조와 사림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훈구대신들은 잎사귀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벌레들이 먹게 하여 중종에게 갖다 줍니다. 한자에서 주초를 합치면 '조'라는 한자가 되고 위왕은 왕이 된다는 소리이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 이런 뜻이죠. 자 이제 연출은 훈구파 대신들이 하였고, 중종은 실행만 하면 되겠죠? 
 

기묘사화 (1519)

 
당시 대사헌으로 있었던 조광조와 사림대신들을 중종과 훈구대신들이 손을 잡고 의금부로 압송하였고, 중종은 조광조와 조광조를 따르던 대신들에게는 곤장과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는지 유배가 있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는데, 조광조는 왕께서 사약을 사사하신 후 말씀이 없냐고 묻자, 따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며 를 적었고 사약을 받은 후 죽게 됩니다. 이를 기묘사화(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라 하고 이때 죽었던 사림파는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묘사화의 여파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또 한 번의 사림파 세력이 제거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조광조의 시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의 죽음과 함께 그가 했던 개혁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현량과가 폐지되었고, 이전과 같이 과거제도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게 되죠. 이후 권세가 막강해진 훈구파 대신들에 의해 중종은 뒤흔드는데, 그만큼 나라의 정세도 같이 흔들리게 됩니다. 성종 때 잠잠했던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죠.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구는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포왜란입니다. 이에 경상도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조선과 왜는 수교를 중단하기도 하죠.
 
이후 왜 나라 막부의 청으로 인해 다시 왕래를 하게 되긴 하지만 조선에서 대마도에게 주었던 콩과 쌀을 이전보다 절반만 주게 되었죠. 그리고 삼포에 왜인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왜의 침략은 계속되었습니다. 북방에서도 야인들의 침략이 잦았습니다. 남쪽의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해 비변사를 설치하였고, 북쪽 야인을 상대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였습니다. 
 
중종은 많은 정책들을 실시했지만 그다지 성공을 거두는 정책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종 본인의 정치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했지만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죠. 사실 중종의 재위기간이 결코 짧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39년이나 재위했으니 말이죠. 물론 세자수업도 받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도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중종은 대신들의 세력을 잔뜩 키워만 놓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가 조선 12대 왕인 인종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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