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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흥청망청 폭군 조선 10대왕 연산군'이융'이야기(feat.무오사화, 갑자사화)

by 포도남(포기는 빠르지만 계속 도전하는 남자)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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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에서 임금의 묘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 명 있는데요. 대부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인데요. 둘 다 묘호를 받지 못하였고, 신하들에 의해서 왕에서 물러난 것은 동일하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둘 다 폭군이라고 하기엔 광해군이 억울할 수도 있겠네요.

 

연산군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대표적으로 폭군이미지가 강하고, 사화도 생각나고요. 흥청망청, 장녹수, 김처선도 생각나실 건데요. 사실 연산군의 세자시절과 재위 10년 간은 폭군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인 연산군의 이미지는 대부분 마지막 재위 2년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연산군 '이융'이야기 시작합니다. 

 

이융 (1476~1506)

 

연산군은 성종 7년 11월 6일 성종과 폐비 윤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산군 이융은 다른 왕들과 달리 세자자리도 경쟁자가 없었죠. 실록에서는 연산군의 어린 시절에 대해 딱히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못하는 것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종은 자기가 엄청 힘들게 공부하였기 때문일까요. 세자인 연산에 대해서는 공부하는 것을 느슨하게 하도록 명합니다. 게다가 본인은 하루에 네 번 경연을 했으나, 세자인 연산에게는 아침에 한번 또는 삼일에 한번 하게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관료들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학문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군은 성종이 하루에 네 번 경연을 하고, 대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간하고 하루가 부족하도록 일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게 임금이야?라고 했겠죠? 그리하여 본인이 왕이 되면 '대신과 관료들을 혼 좀 내줘야겠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신하와 대간들은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 성종 때와 똑같이 하게 되는데.. 

 

앞서 제가 포스팅한 성종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 씨가 불경한 짓을 하여 성종이 사사하여 죽었다고 했는데요. 이때 연산군의 나이는 6살로 당시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산군 본인만 알겠지만, 아마도 왕이 되었을 때 복수를 한 것을 보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성종이 했던 대부분의 업적들을 반대로 했던 것이 연산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산군 (1495~1506)

영화 '간신' 연산군

 

1495년 성종은 천식과 종기로 인해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맙니다. 이때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은 후대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간과 충돌하게 되는데요. 조선은 유교국가였으나, 조선 초기이다 보니 불교식 제사를 치러왔습니다. 하지만 대신과 대간들은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었죠. 선대왕인 성종은 불교를 매우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금승법(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까지 실시했을 정도니 대간들은 이번 기회에 관습을 폐지하고 성리학 질서에 따라 유교식 제사를 지내자고 건의합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불교식 제사를 하자고 건의하니 연산군도 이에 승낙합니다. 불교식 제사를 드린다는 소식에 대신들이 노발대발하며 반대하게 되죠. 게다가 성종의 묘호를 가지고 또 대간들과 한판 붙는데, 연산군은 성종으로 정했지만 대간과 유생들은 인종으로 추존하기 위해 상소까지 올려댑니다.

 

이에 유생들을 유배 보내거나 하옥시키라고 명하게 되는데, 대부분 유생들은 대간, 대신들의 자제나 친인척들이 다 보니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박탈하거나 몇 명만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이게 연산군이 즉위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니 얼마나 대신, 대간들과 기싸움을 벌였는지 아시겠죠? 

 

그러다가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 씨의 묘이야기를 꺼내듭니다. 어머니의 묘가 허름하여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죠. 이에 대신과 대간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습니다. 대신들 중에는 연산군의 어머니가 폐비가 되는 것에 일조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처벌받을까 두려워 묘를 이장하는 것에 적극 찬성을 하게 되죠. 하지만 대간들은 이러한 대신들을 비판하며 탄핵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대간들의 말을 배제하고 묘를 이장하게 되죠.

 

즉위 초 성종시절부터 힘을 키운 대간들의 힘이 너무 세졌다는 것을 안 연산군은 대간들 대신하여 원로대신들의 세력을 키워 견제하려고 합니다. 

 

연산군은 예술적 재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를 짓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특히 좋아했는데요. 특히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가면 쓰고 춤을 추는 '처용무'를 그렇게 잘 추었다고 합니다. 

 

무오사화 (1498)

 

우선 무오사화를 이해하려면 훈구파와 사림파를 알아야 합니다. 훈구파는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을 때의 공신들을 가리키는 말로 연산군시절 원로대신들이 바로 훈구파입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했는데, 언론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대부분이 사림파였습니다.

 

사화라는 의미는 사림이 화를 당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사림의 대표 격인 사람이 김종직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이러한 김종직의 후예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많은 관직에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림들은 서얼 출신 유자광이 세조시절 공신대우를 받으며 관직에 있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여 비난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록청에 이극돈(훈구파)이 실록청 직원 중 김일손(김종직의 제자, 사림)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고 당황합니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된 것을 맹비난한 글이었기 때문이죠. 이극돈은 사림파를 견제할 요량으로 이를 대신해 줄 사람을 선택하는 데, 사림에게 많이 당했던 유자광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실록은 실록청 직원들 이외에는 절대 열람을 하면 안 되지만, 유자광은 실록을 보게 되죠.

 

실록에서는 김종직이 세조를 항우에 빗대어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것에 대해 맹비난하는 글을 발견하게 됩니다.(조의제문)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의 사초를 가감 없이 실록에 적어버렸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대간자리에 많이 있는 사림을 고깝게 여긴 유자광과 이극돈을 포함한 훈구파 대신들은 이때를 기회삼아 사림들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상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종직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김종직의 무덤을 파 시신의 목을 베어버리는 부관참시형을 내립니다. 또한 김일손은 능지처참(사지가 찢기는 형벌)되었고, 여기에 연관이 있는 사림세력들은 대거 유배를 가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오사화입니다.

 

무오사화 이후에 연산군은 나름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대간들과 대신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백성의 말을 귀 기울일 줄고 알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것도 잠시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했었는데, 그 이유는 연산의 변태적인 성생활 때문이라는 소문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잔치도 너무 자주 열고, 궁에 있는 다른 여인들에게 선물을 주는 등 국고는 날로 비어만 갔습니다. 

 

갑자사화 (1504)

드라마 역적에서 이항과 이봉, 연산군

어느 날 밤, 폐비 윤 씨의 어머니가 연산군을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윤 씨의 어머니는 윤 씨가 성종의 후궁들에게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고, 성종은 후궁들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전했는데요. 게다가 윤 씨의 어머니가 연산군에게 건넨 것은 윤 씨의 피가 묻은 손수건이었습니다. 이에 연산군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 씨와 엄 씨 두 여인이 어머니를 모함하여 죽였다는 이유로 매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항과 이봉을 데려오라고 말을 합니다.

 

이항과 이봉은 연산군에게는 이복동생들이었는데요. 앞에 있는 두 여인은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라며 몽둥이를 주고 때리라고 시켜버리는데요. 이항은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인지도 모르고 매질을 하고, 이봉은 자신의 어머니를 눈치채고 매질을 하지 못합니다. 자식이 자신의 어머니를 패라고 하다니요. 정말 폭군 중 폭군입니다. 그리하여 성종의 후궁이었던 두 여인이 숨을 거두고, 곧바로 계모인 자순대비 침소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자순대비는 무서운 나머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이번엔 이항과 이봉의 머리채를 잡고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로 갑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술 한잔 받으라고 권하는데, 인수대비는 겁에 잔뜩 질려있었으나, 마지못해 술을 받아마셨는데요. 연산군은 인수대비에게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소리치게 됩니다. 이 일이 있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인수대비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 후 앞에서 매질을 당해 죽었던 후궁인 엄 씨와 정 씨를 젓갈을 담그라고 명합니다. 우리가 아는 그 젓갈이 맞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어머니를 매질하여 죽인 이항에게 말을 선물하는데요. 완전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죠? 피의 서막이 시작되었네요. 

 

광기의 연산군

 

이제 연산군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 씨를 왕비로 추존하는 작업을 하게 되죠. 그리고 실록을 샅샅이 뒤져 자신의 어머니가 사사되어 죽는 것에 관여된 관료를 조사하라고 명하게 됩니다.

 

이세좌, 윤필상 등을 죽이고, 성종 재위 시 재상이었던 한명회, 정인지 등 묘를 파서 시신을 꺼내고 해골의 머리를 자르는 부관참시를 합니다. 그리고 윤 씨를 폐할 때 있었던 신하들을 모조리 유배 보내버리거나 죽여버리고, 그들의 친인척까지도 똑같이 형벌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까지는 윤 씨가 폐할 때 있었던 신하들이었는데요. 

 

지금부터는 폐비 윤 씨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손을 보기 시작합니다. 당시 정승이었던 한치형, 이극균, 성준을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당시 이미 죽었던 한치형을 부관능지, 이극균은 사형, 성준은 효수형에 처해집니다. 한나라의 정승들을 이리도 극악무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연산군이 수박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이를 말렸다고 죽이고, 시를 한수 바치라고 했는데, 두 수를 바쳐서 죽이고 등등.. 끝도 업이 죽어나갑니다. 

 

갑자사화 이후에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했습니다. 앞에는 충, 뒤에는 성이 쓰여있는 모자를 쓰고 다니게 했으며, 신언패라는 것을 가지고 다니게 했는데요. 이 뜻은 혀놀림을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유교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유생들에게 임금의 가마를 메게 하였습니다. 또한 홍문관과 사관원을 폐지하며, 유교정치를 했던 아버지인 성종의 업적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흥청망청, 장녹수

 

연산군은 폐비 윤 씨의 제삿날에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나누기도 했는데요. 심지어 재상들의 아내들도 겁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갈수록 향락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모든 신하들을 비단옷을 입게 했으며, 궁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화장을 하고 다니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경기도 일대에 장녹수 등과 같이 놀 수 있는 곳에 금표라는 것을 설치하여 민가는 모두 헐어버리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경기도에 땅이 남아나지 않자 당시 충청도에 속해있던 평택을 경기도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지금 경기도 평택이 연산군 때 경기도로 편입이 된 것이죠.

 

그리고 여색을 탐했는데, 채홍사를 통해 전국에 있는 어여쁜 여인을 궁으로 데려와 기생으로 만들고, 등급을 나누었으며 이에 제일 높은 등급이 바로 흥청입니다.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 샘이죠. 심지어 이러한 기생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참 대단하죠. 이 기생의 권세가 대신과 맞먹었다고 하니 참 어이가 없네요. 흥청이 되면 한양에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엄청난 혜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장녹수는 평범한 천민출신이었습니다. 시집도 여러 번 간 유부녀였고요. 이러한 장녹수는 춤과 노래를 배워 기녀가 되어 연산군을 만나게 됩니다. 장녹수는 얼굴이 출중하지도 않았고, 나이가 어리지도 않았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과 엄마, 아들 역할놀이를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장녹수에게로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날 한글로 된 투서가 전달됩니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살인에 대한 비난이었던 것이죠. 그리하여 한글사용을 아예 금해버립니다. 이러한 투서로 자신의 미래가 불안했는지 자신의 호위병력을 늘리는 등 극도로 불안해합니다. 그러던 중 세종 때부터 임금을 모시던 김처선이라는 정 2품 내시가 있었는데, 죽을 각오로 연산군에게 간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칼을 꺼내어 팔과 다리를 베었는데, 그럼에도 계속 간언을 하자 아예 활을 쏘아 죽였습니다.

 

슬슬 자신의 불안한 끝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요.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장녹수와 여인들을 거느리고 술을 마시던 연산군은 울면서 '내가 만약 변고가 생긴다면 너희들도 무사하지는 못하겠다'라고 하는데요. 결국 일주일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고, 연산군은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폐위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고, 두 달 후 쓸쓸하게 죽게 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6살에 어머니가 폐위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나이이고, 그 이후 어머니 제사를 지낼 때도 있었으니 말이죠.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일부러 자신에게 간언 한 사람들을 제거하여 아버지인 성종과 다르게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조선의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융'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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