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우리에게 너무 나도 익숙한 군주이죠. 특히 한글은 전 세계에서 만든 이 와 만든 날짜가 있는 유일한 문자인 것 아시나요? 게다가 국제 석학들로부터 인정받은 한글입니다. "어느 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성취이자 기념비적 사건" <로버트 램지, 미국언어학자>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존 맨, 영국 역사학자>, 세계 모든 문자 중 가장 우수한 문자 <옥스퍼드 영국 대학> 이러한 한글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고, 특히 과다카날주 말라카이족이나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과 같이 자신들의 문자가 없어 한글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시 유네스코에서 주관하는 세계 문맹퇴치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세종대왕 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입니다. 한글 자체로만 해도 대단한 군주이지만, 이 것 말고도 어떠한 다른 업적과 세종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아볼까요.
유년기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고, 이름은 이도입니다. 유년시절은 우리가 아는 세종과는 다르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태종실록을 보면 "이도는 성질이 고약해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당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잘난 채하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해서 형제들의 눈총을 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고기반찬을 좋아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 등 반찬투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도는 식사시간에도 책을 읽었을 만큼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요. 아버지 태종이 이를 보고 몸이 걱정되어 책을 다 치우라는 어명을 내려, 책을 모조리 회수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나가서 뛰어놀고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기에 걱정되어 그랬겠죠. 하지만 병풍 밑에 못 다 치운 책 한 권이 있었는데, 그 책을 천 번을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법학, 역사, 천문, 음악, 의학, 유학 등 많은 책을 읽으며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가게 되죠.
충녕군
12살인 이도는 충녕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같은 해 인성과 성품이 뛰어난 소헌왕후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훗날 이 소원왕후는 충녕군이 세종이 되며, 오히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게 됩니다. 외척세력이 왕권강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태종은 충녕군의 장인인 심온을 역모죄를 씌워 처형하게 되죠. 하지만 이 와중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슬하에 8남 2녀를 둘 정도로 매우 사이가 좋았습니다.
당시 충녕군은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적장자인 양녕대군이 있었기 때문이죠. 태종은 양녕을 매우 좋아하고 아꼈습니다. 어렸을 적, 정도전 일파에 의해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태종 이방원에게 기쁨을 주는 양녕만 바라보며 애지중지 키웠기 때문이죠. 무릎에서 내려오지 않게 키웠다고 하였다고 하니, 양녕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것 같죠?
하지만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심기를 건드리고, 세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여자문제로 속을 썩이는데, '어리'라는 다른 남자의 첩을 사랑해 궁궐로 들여 사랑을 나누었으며,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게다가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궁으로 건달들을 들이는 행동을 하게 되죠. 이에 양녕의 비행을 여러 번 감싸준 태종이지만 신하들의 건의로 폐세자 하게 되어 3남인 충녕군을 세자를 책봉하게 됩니다. 세자를 충녕군으로 책봉 한 날 태종은 펑펑 울었다고 하니, 양녕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을지 상상이 되네요.
두 달 뒤 세종은 22살의 나이로 조선의 4대 왕으로 오르게 됩니다.
세종 (1397~1450)
1대 왕 태조는 '이성계', 2대 왕 정종은 '이방과', 3대 왕 태종은 '이방원'과 같이 왕이름은 성을 제외하고 두 글자이지만 세종부터는 '이도', 한 글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왕의 이름은 피휘(이름을 피하다)라고 하여 왕의 이름을 함부로 쓰거나 부르지 못하고도록 하였습니다. 방원을 예로 들면 신하들이 공문서를 작성할 때 '방', '원' 두 글자를 피해서 글을 작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하들과 백성들이 매우 힘드므로, 조선의 왕부터는 한 글자로 지어지게 됩니다. 세종부터 한 글자인 이유는 조선이 개창하고 왕에 봉해진 첫 임금이기 때문이죠.
세종이 왕이 되었음에도, 태종이 군권과 인사권을 쥐고 상왕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종 1년에 대마도 정벌을 실시하는데, 사실 세종의 업적이라기보다 군권을 가지고 있던 상왕 태종의 업적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세종은 재위시절 자신의 의견을 반대하는 반대파라 하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등용하는 등 포용과 배려의 정치를 실행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국방, 과학, 음악, 예술, 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국사 책에서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을 구축해 지금의 한반도 지도를 완성했다'라고 많이 들어보셨죠?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를 북방에 파견하여 이룩한 업적입니다. 과학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업적이 많은데요.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발명하였고, 특히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의 자식임에도 장영실을 등용하는 등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과학분야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조세제도는 부자는 덜 내고 가난한 사람은 더 내는 상황이었는데요. 이를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으로 나누어 토지의 비옥도에 따른 세수를 걷게 합니다. 또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하는데요. 5개월 동안 여론조사결과, 찬성 57%, 반대 43%가 나왔고, 찬성이 과반 이상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조세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농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농사 관련 서적은 대부분 중국의 농법이므로 토지의 상태, 일조량, 기후 등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로 인해 궁 안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모아 <농사직설>을 편찬했습니다.
애민군주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왕이었습니다. '신하들이 고달파야 백성들이 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세종이 즉위하고 7년 동안 가뭄이 심해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자, 광화문 사거리에서 죽을 끓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저리 힘들어하는데 나만 좋은 기와지붕 밑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하며, 초가집을 짓고 2년 4개월 간 이곳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당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노비는 물건과 같이 증여, 매매, 상속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애민군주 세종은 노비와 같이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에도 힘을 쓴 군주였습니다. 조선의 노비는 소속된 양반이 죽여도 아무런 죄를 묻지 않는 시대였는데요. 하지만 세종은 개인의 사노비라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노비들에게 출산 한 달 전 휴가, 출산 후 100일 휴가 심지어 남편에게도 한 달간 출산 휴가를 주었습니다.
훈민정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농사에 관한 책을 편찬했지만,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백성들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해 무용지물이 돼버렸고,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관아에 소송을 해야 하는 데, 글을 모르니 양반들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부탁을 양반들이 들어줄 리가 없었겠죠.
이를 가여워했던 세종은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글을 만들 수 있는 집현전 학자들 일부와 함께 은밀히 진행하게 됩니다. 왜 은밀히 진행했을까요? 당시 집현전 학자들과 신하들은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로, 사대하는 중국의 한자가 세계 최고의 문자였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글과 같이 쉬운 글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거나, 천한 것들에게 글자는 필요 없다고 하여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임을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마침내 세종 25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과학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됩니다. 이로써 전 세계 7천여 개의 문자 중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아는 유일한 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왕이 백성을 위해 글자를 창제한 역사는 전 세계, 세종 이전에도 없었으며, 세종 이후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종합병원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당뇨, 두통, 이질, 수전증, 풍질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큼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32년 재위기간 중 20여 년은 극심한 눈병에 시달리기도 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국정을 살피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 세종말년, 세종을 대신하여 아들인 문종이 대리청정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제 블로그에 문종이야기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s://repairman.tistory.com/entry/%EC%A1%B0%EC%84%A0%EC%9D%98-%EC%A4%80%EB%B9%84%EB%90%9C-5%EB%8C%80%EC%99%95-%EB%AC%B8%EC%A2%85-%EC%9D%B4%ED%96%A5%EC%9D%B4%EC%95%BC%EA%B8%B0
조선의 준비된 5대왕 문종 '이향'이야기
보통 영화나 드라마 속 문종의 이미지는 어떠한가요? 병약하고, 나약한 이미지로 일찍 요절한 것처럼 방송에 나오고 곤 하죠. 하지만 문종은 39살까지 살았습니다. 조선 왕들의 평균 나이가 46세
www.48lrc.com
승하하기 3일 전까지 국정을 살피던 세종은 52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떠셨나요. 세종은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한 군주였습니다. 또한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했으며, 특히 우리의 농사법 <농사직설>, 우리의 천문 <칠정산>, 우리의 글자 <훈민정음> 등 우리 것에 대한 정말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 초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군주였습니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죠. 어떻게 5월 15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이 되었을까요. 이 날은 바로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이 5월 15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 '세종대왕'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셔 감사합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왕이될 상인가? 조선 7대왕 세조'이유'이야기(feat.계유정난) (2) | 2023.02.25 |
---|---|
비운의 소년군주 조선 6대왕 단종'이홍위'이야기 (feat.계유정난) (2) | 2023.02.23 |
고려 정몽주 vs 조선 정도전 (0) | 2023.02.15 |
준비된 성군, 조선 5대왕 문종 '이향'이야기 (2) | 2023.02.13 |
소심한 겁쟁이? 조선 2대왕 이방과 '정종'이야기 (0) | 2023.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