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인조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말하자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암군 중 암군은 선조와 인조인데요. 그 이유는 같습니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두 전쟁을 거치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선조는 왜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웠던 장수들과 광해군을 시기질투하였고, 인조는 자신을 대신해서 인질로 끌려간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시기질투하였죠.
또한 이 두 암군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등, 현재를 사는 입장에서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조와 암군으로 비교되는 선조는 따로 포스팅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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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방계출신 조선 14대왕 선조'이연'이야기(feat.임진왜란)
선조하면 생각나는 것 있으신가요? 저는 임진왜란, 질투의 화신, 프로도망러 정도 생각나네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도 인조와 더불어 1위, 2위 하겠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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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 능양군 (1623~1649)
사실 인조의 어린 시절은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능양군으로 봉해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죠.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능양군은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였습니다.
항상 왕권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은 자신과 같은 후궁소생의 자녀들의 늘 견제하곤 했습니다. 특히 정원군의 아들인 능창군(능양군의 동생)은 군왕의 기질이 다분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총명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할 만큼 다재다능한 인재였습니다.
어느 날 정원군의 가족이 있는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말을 듣고 정원군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리고 맙니다. 이에 능창군은 스스로 자결을 선택하고, 아버지인 정원군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능양군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광해군을 두고 볼 수 없지 않았을까요? 광해군의 견제로 인해 가족을 잃은 능양군은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합니다.
인조반정 (1623)
당시 광해군에게 대적했던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서인세력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중립외교를 비판하였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서인세력은 대의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력으로 임진왜란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명군이 도와주었기에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세력이었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다스리는 명군이 참전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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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명나라, 만력제 이야기 (feat.장거정)
여러분 임진왜란의 영웅 하면 누가 생각나시나요? 성웅 이순신, 권율 장균, 김시민 목사, 홍의장군 곽재우, 광해군 등등 생각나시죠? 하지만 명나라의 황제였던 만력제가 중국에서는 최고의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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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명사대를 원하는 서인과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능양군이 뜻을 함께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인조반정세력은 이괄을 필두로 약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창의문으로 진격하고, 창의문 안에서 내응 한 훈련도감 이홍립으로 인해 쉽게 반정은 쉽게 성공하게 되죠. 이렇게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16대 임금, 인조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반정에 대한 명분에 대해 '반면교서'에 잘 쓰여 있는데요.
첫째, 사대관계에 따라 '명나라'를 따르고 오랑캐 '후금'(청)을 배척해야 하는데, 광해군은 후금과 사이좋게 지내려 하였다. (중립외교 비판)
둘째, 인목왕후(계비)를 폐하고 영창대군(동생)을 죽였다. (폐모살제 비판)
셋째, 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의 전횡
넷째, 무리한 토목공사로(궁궐공사)로 인해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인조 (1623~1649)
인조는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배금(명과 친하고 금나라를 배척)의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도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는 반면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은 명나라를 압박하며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는 중이었죠. 안타깝게도 인조와 서인세력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명나라와의 사대만을 주장합니다.
이괄의 난 (1624)
인조는 집권초기에 큰 반란이 일어나는데, 앞에서 언급하였던 이괄이라는 자는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반정군을 진두지휘하며 큰 공을 쌓았죠. 하지만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중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이 되고, 외지인 평안도 북방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인조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불만이 집권세력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괄을 견제하던 서인이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라며 인조를 몰아세우게 되죠. 이에 이괄의 아들을 직접 체포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파견하는 데, 금부도사에게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더냐?'라고 하며 금부도사를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북방 수비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괄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며 이괄의 난은 평정되었지만, 인조가 수도인 한성을 버리고 현재 충남 공주로 도주할 정도로 굉장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나라 안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임금이 도성을 떠난 것은 처음이기에 임금과 백성들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건이었죠.
인조시기에 이괄의 난은 대부분 모르거나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괄이 북방의 수비대를 이끌고 내려왔기 때문에 북방의 군사력이 허술해질 대로 허술해졌으며, 이괄의 부하들 중 한윤을 포함한 일부가 후금으로 들어가 중립외교를 주장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현재 조선의 임금이 친명배금정책을 한다며 후금에 일러바쳤기에 두 번의 호란을 겪어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정묘호란 (1627)
이에 후금은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3만의 기병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인조는 그들이 기동력을 앞세워 쳐들어온 것을 알아채고는 소현세자에게 분조를 맡기고,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게 되죠.
조선군은 후금군에 맞서 싸우고 퇴각하고를 반복했습니다. 사실 청은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내려온 것은 아니었죠. 위협만 주기 위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저항에 시일이 길어지며 교섭을 하게 되죠.
인조는 강화도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후금은 몽골군이기에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낯설고 어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강화도로 피난을 간 인조는 그동안 오랑캐로 여기던 후금과 후금의 군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형제관계를 맺습니다.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동생이 되는 것이죠. 또한 후금은 전쟁을 멈추는 조건으로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이때 원창군을 인조의 동생으로 속여 후금으로 보내버렸죠. 국가 간 교섭에서 거짓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병자호란 (1632)
정묘호란 후 5년이 지나고, 명의 세력은 점점 더 약해졌으며, 후금의 황제인 '홍타이지'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의 국가로 칭하며 조선에게 형제국가가 아닌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압박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신하의 나라가 되라는 것이죠.
게다가, 홍타이지의 청나라 황제 즉위식에 각국의 사신들이 와서 머리를 숙여 황제에게 예를 갖추었으나, 조선에서 사신으로 간 나덕헌과 이확은 두 황제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이 두 사신은 엄청난 구타를 당한 뒤 조선임금의 세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청황제가 준 국서를 가지고 조선으로 와야 했으나, 너무 무서운 나머지 그 국서를 버려버리고 말았죠.
시간이 흘러 조선의 세자가 청나라로 오지 않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청황제 홍타이지는 1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즉시 조선을 침략하라고 명합니다.
이러한 혼란 속 정묘호란을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조선은 두 개의 파로 나뉘게 됩니다. 척화론자와 주화론자로 말이죠.
척화론자(청과의 화친은 불가)의 입장은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청)은 우리나라에 있어 부모의 원수입니다.' [인조실록 1636]라고 주장하였죠. 대표적인 척화파 인물로는 김상헌이 있습니다.
주화론자(청과의 화친을 주장)의 입장은 '요즈음 대각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척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유독 화의를 주장하는 의견은 언론이 몹시 정당하고 방량이 채택할 만하니 대중을 따라 부화뇌동하는데 비길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인조실록 1636]이라고 주장하였죠.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명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친청주의자였고, 인조의 반대세력이었냐? 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죠. 사실 최명길의 경우 인조반정에 가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소수파의 의견인 실리를 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 당시 조선사회에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과 청 사이를 오가며 사신역할을 수행하였고, 결정적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의 빠른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최명길 자신이 청의 진영으로 가서 인조가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죠.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청의 군대와 협상을 하기 위해 궁을 나섰으나, 다른 신하들은 다 도망가고 최명길 혼자 남아 청과의 소통을 위해 움직입니다. 당시 청의 진영을 보고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생각을 했겠죠. 제 생각에는 최명길이야 말로 충신이었다고 생각이 드네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떠오르는 태양의 청나라, 지는 태양의 명나라 중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히 전자인 청나라에 어느 정도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당시는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중요시했던 선비들이었습니다. 주화파가 전체의 5%도 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소수의 의견이 있었죠.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당연히 척화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이를 알게 된 청은 조선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성벽을 쌓았고, 낡은 성은 보수를 하여 공성전 위주로 준비를 하였죠. 하지만 이때 청나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략을 사용하는 데요. 주변의 성을 무시하고 바로 한성까지 냅다 달려 왕을 사로잡는 전략입니다. 인조만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 것이죠.
인조입장에서는 당황했습니다. 정묘호란을 겪었던 인조이기에 성에서 적당히 방어하다가 안되면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너무 빠르게 진격한 청의 군대는 이전의 기억을 되살려 조선의 임금은 강화도로 또다시 피난을 갈 것이 분명하기에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먼저 차단해 버립니다.
당황한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에서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성남시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게 된 것이었죠. 이에 남한산성 주변에 청의 20만 군대가 빙 둘러싸고 항복할 때까지 지치게 만들 셈이었습니다.
음력 12월 한 겨울, 40여 일이 지나고 성안의 식량은 떨어져만 가고 굶주려 죽는 병사와 말들이 속출하였으며, 살아있는 병사들도 동상으로 인해 손과 발을 자르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제 결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청나라에 항복을 할 것이냐, 아니면 싸울 것이냐'로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국 남한산성에서 버티지 못한 인조는 항복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죠.
이에 청에서는 항복의 예로 조선의 임금은 신하의 복장인 남색의복을 입고 삼전도(현재의 잠실)에 재단을 쌓아 재단 위에 있는 청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를 행하는 의식을 치릅니다.
바닥에 머리가 쿵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머리를 땅에 부딪혀야 하기에 인조의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으며, 그를 본 신하들은 통곡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현재 서울 삼전동은 나루터가 있던 섬이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박정희 정부에서 삼전도 일대를 연탄재로 묻어 지금의 삼전동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세자였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고 아녀자 50만 명은 청의 노리개와 노예로 끌려가게 되죠. 청에 노예로 갔다가 돌아온 아녀자들을 부르는 말로 '환향녀'라고 칭하는 데 실제의 뜻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를 뜻하지만 당시에는 욕처럼 쓰이기도 하였고, 몸이 더러워졌다며 차별을 받는 등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안기게 됩니다.
병자호란 후
인조는 선조와 같이 전쟁 후 자신의 무능을 질투로 표출하는데, 그 질투의 화살은 바로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향하게 됩니다.
8년간 청나라에 볼모생활을 한 소현세자는 혹독한 청나라의 대우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행하게 되죠. 이러한 소현세자가 맘에 들었는지 청에서는 소현세자의 능력과 인품을 좋게 보았고, 황실행사에도 초대하는 등 훌륭한 외교관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이를 팔아 이문을 남기고 남긴 이문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간 조선인들 사서 조선으로의 송환에 앞장섭니다. 하지만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위협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분명히 나를 내쫓고 소현세자를 조선의 임금으로 앉히겠지?'라는 몹쓸 생각을 하게 되죠.
드디어 청나라에서의 볼모생활이 끝나고, 1645년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 부부에게 인조는 축하는커녕, 멸시하는 눈빛으로 소현세자를 바라보았죠. '나의 원수인 청인데, 너는 친청주의자가 다 되었구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청나라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본 소현세자는 신문물을 조선에도 적용시키기 위해 들여왔는데, 이것 또한 못마땅하게 생각한 인조가 큰 소리로 꾸짖으며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죠. 인조에게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벼루를 진상했지만 인조는 그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져버렸습니다.
소현세자가 청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두 달여 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실록에서 조차 마치 독약에 중독된 것 같다고 표현을 해놓았죠. 소현세자가 죽을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장례는 금세 준비가 되었고, 속전속결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인조가 일부러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소현세자에게 엄청난 질투를 느꼈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이기에 부자간의 애정이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욕이 한 번 나오는데 바로 인조가 내뱉은 말이었죠. 소현세자를 개새끼라고 까지 표현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 장례 후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유배 보내고, 아내 강 씨에게 사약을 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합니다.
인조는 고통과 굴욕의 시간 속 1649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인조의 업적관련해서 많은 사료를 찾아보았으나, 정말 뚜렷한 업적이 없습니다. 수어청을 설립했다. 수도방어를 위해 총융청을 창설하였다. 이 정도인데요. 이것을 업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몸소 느낀 인조이야기 어떠셨나요? 저는 인조는 그렇다 쳐도 소현세자가 정말 아깝습니다. 청나라에 볼모생활을 하면서 조선과 청사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고,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의 생환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신문물을 조선으로 도입하려 했던 소현세자가 차기 왕이 되었으면.. 하고 말이죠. 여기까지 잘못된 도망자 조선 16대 왕 인조이야기였습니다.
병자호란의 경우 많은 분량으로 인해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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