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효가 효도하다 할 때 '효(孝)'자인 거 아시나요? 그 이유는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며 북벌을 내세워 청나라를 정벌하려 했기 때문이었죠. 아버지가 청나라에 굴복을 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겪으며, 자신의 형과 함께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효종이야기 전 16대 왕 인조이야기는 아래 링크하니 참고 바랍니다.
https://repairman.tistory.com/entry/injos-story
잘못된 도망자, 조선 16대왕 인조'이종'이야기 (feat. 인조반정, 병자호란, 이괄의 난)
여러분은 인조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말하자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암군 중 암군은 선조와 인조인데요.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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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대군(1619~1659)
광해군 11년, 능양군(인조)과 인열왕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새어머니는 장렬왕후로 후에 현종시대에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자의대비입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조선은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조선의 50만 여성을 청의 노리개와 노예로 보내게 됩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있는 8년 동안 청나라의 발전과 진보된 서양문물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되죠. 또한 청나라 볼모생활에서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적극적으로 보좌하였습니다.
볼모생활이 끝나고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현세자의 경우 조선을 위해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발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봉림대군은 방향은 같았으나, 행동은 달랐습니다. 소현세자와 달리 청나라의 비싼 선물을 마다하고 그만큼은 조선인 포로를 송환해 달라고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죠.
소현세자가 갑작스레 죽고, 왕실에서는 다음 세자를 누구로 정할지에 대해 논의가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관례대로 하면 소현세자의 아들인 이백(이석철)이 세자가 돼야 하는 것이 관례이나,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갑자기 세자의 자리에 앉게 된 봉림대군은 행여 자신에게 정통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늘 행실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왕이 된 후 즐겨 마시던 술을 죽을 때까지 끊었고, 최대한 검소하게 지내려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죠.
효종(1649~1659)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조선 제17대 왕 효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효종이 왕위를 이어받아보니 당시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부실 그 자체였습니다. 유자의 나라인 조선조정에서는 전후 복구는커녕 성리학적 사고만을 강조하고 있었죠.
효종으로서는 이들과 함께 국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선 오랑캐인 청을 친다는 명복하에 청나라에 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김자점(인조와 소현세자를 갈라놓은 장본인)을 비롯한 친청세력들을 제거하려 하는데요.
이를 눈치챈 김자점은 급기야 청나라에게 '새로운 조선의 왕이 친청 세력인 옛 신하들을 내치려 한다'는 내용을 고발합니다. 그 이유로는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장릉지문(인조의 업적을 기린 능석)을 그 증거로 하게 되죠.
청나라에서는 급히 사신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으나, 이시백의 능통한 외교술로 인해 별 탈 없이 잘 넘어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김자점은 유배를 가게 되는데요. 1651년 김자점은 역모를 꾸미려 했으나, 미리 발각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임)을 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로써 모든 친청세력들은 숙청을 당하고 새로운 인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니 바로 산림이었습니다. 산림이란 청나라에게 나라를 뺏기고 오랑캐에게 지배당하는 나라에서 관직을 할 수 없다며 낙향한 학자들을 뜻하는 말이고 당시 조선은 이러한 학자들이 존중받는 사회였습니다.
관직을 하지 않았음에도 관직을 하고 있는 신하들보다 예우받는 그런 사람들이었죠.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산림세력으로는 송준길, 송시열, 허목 등이 있습니다.
북벌의 꿈
원리원칙인 사대부의 서인과 산림들 입장에서는 효종에게 정통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죠? 왜냐면 위에서 언급했듯 소현세자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이 유교법도에 맞기 때문이죠. 반대로 효종입장에서는 산림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국정운영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효종과 산림, 둘 다 한뜻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네, 바로 북벌입니다. 효종입장에선 아버지의 원수인 청을 치고 원수를 갚아야만 했고, 집권세력인 서인들은 병자호란을 거치며 땅에 떨어진 사대부의 권위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죠.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제일 먼저 도망가는 사대부들의 모습에 권위가 땅에 떨어짐)
북벌(청을 정벌)의 뜻을 내비친 효종은 재야에 있는 산림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는데요.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세력의 대표 격인 송시열을 위시하여 정책을 펴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북벌에 대한 효종과 서인의 방법론적인 생각은 서로 달랐죠.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국방력강화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652년 북벌을 위한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기존 병력보다 3배 이상 증가된 2만 1천 명의 부대로 성장시켰고, 훈련도감 또한 4천 명에서 7천 명 수준으로 증가시켰죠.
게다가, 왕의 직속 호위군인 금군을 기병화하였으며, 네덜란드에서 표류한 하멜을 통해 조총기술을 받아드려 조선의 조총을 개량함으로써 국방력을 강화시켰습니다.
나선정벌(1654)
북벌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654년,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는 조선에게 청나라와 러시아(나선)가 국경분쟁을 하고 있으니, 조선의 조총병을 러시아와 전쟁하기 위해 원군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로 향해야 하는 조총부대를 청을 돕는데 쓰라니..
효종은 고민하였지만, 러시아가 좋은 스파링 파트너가 될 것이라며, 두 차례 청나라를 지원하는 부대를 보내어 좋은 성과를 거둠으로써 북벌에 대한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해독대(1695)
북벌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한 효종이었으나, 어찌 된 것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이 북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송시열과 함께 양송이라고 불리던 송준길은 관념론적인 북벌로써 '청을 치는 것보다는 수신을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애초부터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을 칠 명분으로 내치에만 힘쓰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며 백성들의 비난을 사대부에서 청으로 돌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효종은 이들과 담판을 짓기 위해 송시열과 함께 독대를 진행하게 되는데요. 이 것이 바로 기해년에 진행한 기해독대입니다. 보통 신하들이 임금과 독대를 할 때는 사관들이 옆에서 내용을 적는 것이 통상적이나, 이례적으로 사관까지 물리며 효종은 송시열에게 북벌에 대한 전략으로 '10만에 달하는 포병이 북진을 진행하고, 만주지역에 있는 한족들까지 함께 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매우 구체적이었고, 성공가능성도 매우 높았던 전략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송시열은 '수신형가(몸을 닦고 집을 다스린다)'라며 거절의 뜻을 밝혔죠. 송시열과 송준길, 서인세력은 북벌은 내치를 하기 위한 것 일뿐 실제로 북벌은 망상과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효종의 승하
기해독대가 있고 난 두 달 후인 1695년 5월 4일, 그동안 앓고 있던 귀 밑 종기가 심해져 어의였던 '신가귀'를 불러 종기 부분에 침을 놓게 하였는데, 침을 맞은 후 잠시 좋아지는 것 같았으나 피가 멈추지 않아 과다출혈로 인해 갑자기 승하하게 됩니다. 신가귀는 심지어 수전증이 있었음에도 침술을 놓았는데요. 후대에는 '서인이 효종을 죽였다'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이죠.
조선은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곧바로 관을 짜 맞추어 놓고 승하하면 그 관에 묻히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이 승하하고 묻기 위해 관에 넣으려고 하니 어깨가 너무 넓어져 있던 효종은 관을 다시 짜 맞추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맙니다. 이처럼 효종은 북벌을 위해 나라뿐만 아니라 효종 본인도 무예를 닦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효종의 업적
효종은 조선의 17대 왕으로서 10년 간 통치하였습니다. 북벌을 위해 어영청, 수어청, 훈련도감을 재정비하여 국방력강화에 힘썼으며, 충청도, 전라도 일부까지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여 백성의 세제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고, 호란 이후 어지러웠던 민생을 안정시켰죠.
개인적으로 효종은 훌륭한 군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8년 간의 청나라 볼모생활을 잘 견뎠고, 세자교육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세자가 되었으며, 정통성이 부족한 조건에서도 내부적으로는 전란수습을 잘하였고, 외부적으로 국방력을 높였던 임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이라는 산림세력을 중앙정계로 끌어들여 현종시대부터 성리학적, 유교적 예법만 강조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예송논쟁)
지금까지 17대 왕 효종'이호'이야기였습니다. 다음이야기는 예송논쟁과 18대 임금 현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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